런던의 한 레스토랑. 그리고 이 레스토랑을 들락날락거리는 검은 옷의 사나이들. 이들은 런던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하는 러시아 마피아들이다. 그 레스토랑은 그러니까 러시아 마피아 런던 지부의 아지트 정도. 아마도 범죄 집단으로서 러시아 마피아의 모습을 영화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위 오운 더 나잇> 도 뉴욕에서의 러시아 마피아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그 검은 옷의 사나이들 중에는 레스토랑의 주인이며 그 러시아 마피아의 보스인 세미온 (아민 뮤엘러 스탈, <뮤직박스>에서의 그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철없는 망나니인 보스 2세 키릴 (뱅상 카셀, <증오>에서의 그 악동), 그리고 키릴의 시다바리이자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니콜라이 (비고 모텐센, <폭력의 역사> 에서의 그 살인병기) 가 있다. 그리고 이 세사람의 검은 조직의 세계에, 그 검은 조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여인인 애나 (나오미 왓츠) 가 뛰어 들게 된다.


애나는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실려 온 14살짜리 10대 소녀가 낳은 아기와 그녀가 남긴 일기장을 얼떨결에 손에 쥐게 되고, 러시아식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러시아말을 모르는 탓에 그 일기장 번역을 위해 러시아인이 운영한다는 그 레스토랑을 찾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 그러니까 갱의 아지트인 그곳에서 영화 속 모든 긴장은 시작된다.

그 소녀가 죽으면서 세상에 남긴 일기장과 아기에는 그 러시아 마피아 조직을 위협하는 단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어간 그 10 대 소녀는 러시아가 아니라 그루지아 출신으로 나온다. 그루지아에서 런던까지 돈벌러 몸팔려 와서는 러시아 마피아 밑으로 들어가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복수의 암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최근 보도되었던 러시아와 그루지아의 분쟁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애나는 그 갱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절망의 그루지아 어딘가에 있을 그 아기의 가족을 찾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아기는 마치 <칠드런 오브 맨> 에 등장하는 아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희망과 구원으로서의 존재, 폭력에 밟힌 절망을 극복하고 폭력을 넘어서는 희망을 한몸에 지닌 메타포로서의 존재가 그 아기라는 거다. 그래서 한쪽은 아기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한쪽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


어쨌건 그 그루지아 출신의 10대 소녀가 남긴 아기와 일기장을 둘러 싼 러시아 마피아들과 체첸계 갱들 사이의 복수와 암투, 그리고 비열함과 배신을 서슴치 않는 조직의 생리, 같은 전혀 아름답지 못한, 순전히 잔인한 범죄 집단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 어둠의 세계를 한꺼풀 영화는 관객 앞에서 벗겨 내어 준다.

그리고 영화는 폭력 장면을 거의 리얼리즘 수준의 사실적 묘사로 보여준다. 따라서 감성적 접근으로 생길 수 있는 폭력의 미화 따위의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빈틈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영화에는 총이 등장하지 않으며, 모든 폭력 장면은 주먹과 소리없는 칼부림이다. 그래서 폭력은 더 잔인하고 참고 보고 있기에는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현실로 보여진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로미시즈, 2007> 를 보기 전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유위강-맥조휘의 <무간도> 또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 그리고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를 먼저 보아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대작들의 주요 모티브들을 엮어서, 총 빼고, 일종의 B급 영화의 정서로 거장이 만든 것이 <이스턴 프로미시즈> 아닐까 싶기도 해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A History of Violence, 2005> 가 '폭력의 역사와 근원' 의 단면들을 클로즈-업해서 포착하고 있는 영화라면, 그의 그 다음 영화인 <Eastern Promises, 2007> 은 그 폭력의 현상 (phenomenon) 또는 결과 (consequences) 의 단면들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고 있는 영화로, 이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마치 하나의 연작으로 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다만 이야기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이론상으로는 절망이지만, 실제상으로는 희망일수도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하지만 여전히 절망은 도사리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면 아직도 절망의 공포가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스티브 나이트 원작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섬뜩하고 잔인한 폭력의 장면들은, 마치 이것이 갱 폭력의 리얼리즘이다, 라는 듯이 관객의 눈 바로 앞에서 아주 가깝게 그려지는 탓에, 관객은 언제 터질지 모를 그 칼부림에 조마조마 초조한 마음을 영화를 보는 내내 잠재울 수가 없다.

게다가 영화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갱들의 죽이기 위한 공격의 폭력과 그것에 저항하는 방어의 폭력을 통해 그것의 잔인성과 동시에 권선징악의 도구로 사용됨을 보여주면서 어느 정도는 '희망' 의 긍정적 메세지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범죄 느와르의 서스펜스와 스릴러, 그리고 해피엔딩이라 보아 줄 수 있는 나름의 '재미있는 영화' 로써의 비교적 대중 친화적인 미덕까지 갖추고 있다는 거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A History of Violence> 과 <Eastern Promises> 의 관계는, 이론과 실제, 그러니까 폭력의 이론과 폭력의 실제, 아니면 공식의 이해와 그 연습 문제 풀기, 영화로 이해하는 폭력 공식과 영화로 푸는 폭력 연습 문제, 등등등 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싶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의 비고 모텐센과 암살범들이 벌이는 그 목욕탕에서의 혈투 장면, 말 그대로 혈투 장면인데, 아무 준비없이 이런 장면에 대면해야 하는 관객들에게는 가혹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벌거 벗은 채로 그 잔인한 칼부림의 암살범들과 대면하며 자신을 처절하게 방어하는 비고 모텐센.

온통 문신이 그려진 비고 모텐센의 알몸에 점점 더 많은 피가 묻어나고 상처가 패이기 시작하면서, 어떤 관객은 아마도 패닉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목욕탕에서의 그 굉장히 절제되었으면서도 숨막히는 혈투가 끝나고 그 타일로 덮인 폐쇄 공간에서 벗어날 때까지,

모든 커트 커트는 아찔하고 보면서도 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갱스터의 칼부림에서 무슨 펜싱의 한 장면같은 결투를 기대할 수는 없는 거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의 하나로서 단 한 커트에서도 '폭력의 미화를 용서한다' 라는 철학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모든 폭력의 장면은 사실적이며 절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장면 전에도 니콜라이가 보스 2세의 시다바리에서 공식적으로 마피아의 일원이 되는 입회식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 장면에서 갱 두목들과 주고 받는 대화에서도 역시 범죄 조직에 대한 일말의 미화 부분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냥 '갱은 끔찍한 범죄 집단이다', 가 그 유일한 내러티브일 뿐이다.



2008년 8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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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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