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PBOY's JAZZ BAKERY


일본 TV 드라마는 재미있다고 보라고 손에 쥐어 주며 강추할 때에만 보는 편이다.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 많은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이상하게도 스스로 찾아 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국적 불문하고 시즌 전회를 모두 시청한 TV 드라마 타이틀이 실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면 뻥일까, 어쨌건.

내가 가장 처음으로 본 일본 드라마는 대학원 다닐 때 누가 보라고 CD 11장에 담아 준 <야마토 나데시코>. 최근에 뒤늦게 우리나라 케이블에서도 <내사랑 사쿠라코> 라는 타이틀로 방송이 된 듯 하다. <야마토 나데시코> 는 그 때 나에게 일본 드라마가 "꽤나 재미있는 콘텐츠"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 준 드라마이기도 한데,

그 내용은 간단하다. 가난하게 태어나 오로지 부자집 아들과 결혼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그리고 한번 보면 누구나 반한다는 항공사 스튜어디스 진노 사쿠라코 (마츠시마 나나코) 는 부잣집 자식들과 부지런히 미팅을 하러 다닌다. 그리고 드라마의 전반부는 거의 부자를 쫓는 그녀의 노력을 보여준다.

반면, 수학과를 졸업하고 MIT 공대 장학생으로 진학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와서 가업을 이어받아 조그마한 생선 가게를 운영하는 나카하라 오스케 (츠츠미 신이치) 는 우연한 계기로 그녀 사쿠라코와 미팅을 하게 되고 그녀의 부자 탐색 레이다망에 포착된다. 부자가 아님에도.

그리고 이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오해와 애정과 각자의 인생관 줄타기를 계속하면서 엇갈렸다 만났다를 반복한다. 대단히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시청자로 하여금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로맨스인데,

당시 나는 이 드라마를 대단히 재미있게 보았고 사쿠라코의 그 순수-백치스러운 아름다움 외에도 MIT 공대 수학과 장학생을 포기하고 돌아와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츠츠미 신이치의 그때 그 수수함에 대한 인상을 10년 약간 못 미치는 시간이 흐른 지난 지금 돌이켜 보아도 사라지지 않고 어렴풋이 잡힐 정도로 간직하고 있다.

ooo

그런데 츠츠미 신이치는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 영화 <용의자 X의 헌신> 에서 다시 수수한 수학 천재로 등장했다. 다만 그 수수함이 띠는 색채의 톤이 밝음이 아닌 심각한 어두움으로 변해 있다. <야마토 나데시코> 에서의 수학천재의 사랑과 <용의자 X의 헌신> 에서의 수학천재의 사랑이 발하는 그 빛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야마토 나데시코> 에서는 설레임과 풋풋함이 교차했다면, 영화 <용의자 X의 헌신> 에서는 좌절과 절망이 교차하고, 삶이 죄와 벌의 무게에 짓눌린다. 사랑과 불행이 하나가 된다.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 우울하고 참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회색빛 천을 한 겹 더 두른 느낌이다.

영화는 원작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 에 아주 충실하게 비교적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생각되고, 오래 전에 소설 읽고 남긴 포스트도 있고 해서 영화에 대해서는 굳이 더 이야기 안하려고 하니, 아직 영화를 안 보았고 볼 계획이 없는 분들로서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다면 거의 1년 전에 남긴 <용의자 X의 헌신> 에 대한 글 후반부를 참조해도 좋지만, 계획이 있는 분들은 영화를 보건 책을 읽기를 바란다. 난 기왕이면 소설 읽기를 권한다.

소설에서는 이시가미가 뚱뚱하고 크고 둥근 얼굴에 실처럼 가느다란 눈, 숱이 적은 머리를 가진 수학 난제 풀기가 세상 사는 유일한 낙인 천재이고, 그의 대학동창이자 대학교수에 천재 물리학자에 핸섬하고 젊어 보이는 유가와와의 대비라는 설정이 꽤나 중요하다.

소설의 정점에는 이 천재가 어느 순간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외모가 지닐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인지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소극적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파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 아니면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남긴 탄식이 있기 때문이다. 난 여기서 '고마움과 희망'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따라서 영화에서 츠츠미 신이치가 이시가미로 등장한다고 했을 때 원래는 볼 생각이 없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그 정서가 만들어질까, 그래서 몰입이 될까... 영화에서는 츠츠미가 최대한 꾀죄죄하고 초라하게 나오긴 하지만 일단 그 대비는 약화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영화의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이시가미의 관점보다는 <메종 드 히미코>의 그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우츠미 카오루 (시바사키 코우) 형사와 유가와 관점으로 약간 틀어져 있어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정서가 일단 간접형으로 전환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어쨌건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은 놓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비교적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영화의 전체적인 인상을 떠올리기보다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라는 인물이 보여 준 그 '사랑의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의 (아니면 영화의) 기승전결 '결' 부분은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만들어 놓은 알리바이를 대학 동창이자 천재 물리학자인 유가와가 풀어내는 과정인데 이시가미의 헌신적 사랑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 또는 관객에게는 이시가미의 사랑의 방식이면서 동시에 추리 과정인 이 과정이 흥미롭지 않고 괴롭게 다가온다.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핵심인 알리바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짜릿함을 느껴야 하건만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거다.

하지만 완벽한 알리바이로서 미해결 완전범죄로 남는다고 해서 그 독자와 관객의 괴로움이 해결되는 것도 역시 아니다. 영화에서도 그것은 잘 표현되어 있다. 이시가미의 그 절규... 소설에서처럼 역시 눈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천재건 둔재건 아름답건 추하건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한계들이 너무 답답해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괴로운 경험이 구원의 메타포이자 죽음에서 나를 건진 헌신적 사랑의 대상에게서 가장 큰 좌절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이시가미의 마지막 그 절규를 들으면서 영화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괴로움을 두번이나 경험해야 하다니...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인간은 왜 사랑 때문에 괴로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란 도대체 무얼까" 와도 같은 질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요즘 정말로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2009년 4월 2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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