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PBOY's JAZZ BAKERY


나로 하여금 <언 애듀케이션 An Education> 이라는 영화에 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한 결정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이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관심 밖의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니와 그녀가 다니는 고등학교 영문학 선생님과의 대화 장면으로 선생님은 단지 몇 장면 등장할 뿐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여고생 제니가 멋있어 보이는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고리타분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틀에 박히고 엄격한 학교와 보수적인 부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일탈을 즐기는 그렇고 그런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제니는 그 자유로운 세상에서의 일탈에 취하여 급기야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판단함에 따라 옥스포드도 포기하고 학교를 자퇴하기에 이르지만 제니를 들뜨게 한 자유와 해방의 신세계는 일탈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제니를 처절히 배신하고 만다. 내가 아주 관심있게 지켜 본 대화 장면은 두 개의 세트로 구성되며 하나는 이 배신 이전이며, 다른 하나는 배신 이후다.

배신 전

남자 친구와 파리를 여행하고 돌아 온 제니에게 선생님은 수업 후 이야기한다. "일단 옥스포드에 가지 그러니. 넌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어. 똑똑하고 예쁘잖아." "그러는 선생님은 어디 나오셨죠?" 캠브리지를 나왔다는 선생님에게 제니는 반문한다. "선생님도 똑똑하고 예쁜데 저희들의 유치하고 바보같은 에세이나 읽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나요 ... ... ?"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살려고 캠브리지 갔냐, 로 정리된다.

똑똑하고 예쁘고 캠브리지를 나왔지만 한심하고 유치한 에세이나 읽으며 살아야 하는 영문학 선생님은 제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I'm sorry. You think I'm dead" "그래 너에게는 내 삶이 한심해 보이는구나. 죽은 삶으로 말이야" 하며 돌아서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죄송하다는 듯 아니면 안타깝다는 듯한 제니의 표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배신 후

일탈을 만끽하면서 그 가능성과 즐거움에 도취되었던 자유로운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제니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부모님을 원망한다. 무엇이든 쉽게 빠질 수 있는 어리석은 여고생 딸이 자유라는 환상의 유혹에 빠져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데도 그 실체를 눈치채지 못한 부모에 대해. 그리고 부모의 욕심이 스스로를 눈멀게 하고 자식을 망칠 수 있음을 부모 또한 그제서야 깨닫는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제니는 복학하고 시험을 보고 싶어하지만 학교는 기회를 주지 않고, 제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문학 선생님 댁을 방문한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선생님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가까이서 보게 된다. 문학, 예술, 음악과 함께 하는 삶, 남들에게는 안보이지만 선생님 자신에게는 열정이 있고 풍요로운 삶. 과일을 깎아주려는 선생님께 제니는 이렇게 말한다. "I feel old but not very wise. Ms. Stubbs, I need your help."

+++

어른의 "I'm sorry. You think I'm dead" 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놓은 성장통을 앓은 아이의 "I feel old but not very wise. Ms. Stubbs, I need your help." 이 두 장면은 강렬하게 충돌하고 있으면서도 진정으로 조화로운 대화이기도 하다. 나는 제니가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하여 그 집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장면에 강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래, 이런 것이구나. 가령, 직장 동료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저 직장에서의 내 행동과 말로서 나를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전부일텐데. 그저 그 판단과 이해로 나는 그 사회에서 통할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가령 음악 만들기에 열정을 쏟고 영화광 또는 책벌레로 사는 삶을 이해할까. 학교 수업 시간에만 만나며 한심한 에세이만 읽어야 하는 선생님의 삶이 대단히 지루할 것이라고 여기는 제니처럼.

그들이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부분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다각형을 이루는 내 삶의 한 단면일 수밖에는 없다.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가족도 마찬가지일거다. 이들은 좀더 많은 단면을 공유할 뿐이겠지. 이것은 나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지루한지 행복한지에 대한 판단은 타인이 쉽게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이고.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는 선생님이 사는 모습에서 나는 아마도 제니가 느꼈을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한심한 에세이를 읽는 선생님의 모습은 오로지 내 관심사로 선생님을 판단한 것에 불과한데 마치 그것을 old and wise 라고 생각하게 되는 not very wise 한 실수를 부모이건 자식이건 누구나 아주 쉽게 범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나만의 free will 자유의지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자유의지이겠지만 수많은 자유의지가 모인 사회에서는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바뀌고 누구나 제니처럼 인간은 결국은 현명하지 않은 선택을 통해 타인의 삶의 단면만을 보게 될 뿐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고 유치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성장통이 필요하고 그래서 아픈만큼 성숙하다고 하는 것인지...

2010년 4월 28일 작성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0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