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주자의 고독>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빔 벤더스의 영화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제목이 연상되었다. "전후 영국 문단을 풍미한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n) 그룹의 일원으로, 소외받는 노동자와 반체제적인 청춘의 삶을 묘사한 작품세계로 호평받았다." 라고 소개된 "앨런 실리토" 라는 저자 소개글도 나의 흥미를 끌었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 외에 8편의 단편이 함께 실린 이 소설집은 국내에 소개된 앨런 실리토의 첫 단행본이지만, 이 책이 출간된 작년에 저자는 8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호손덴 상을 수상한 표제작 <장거리 주자의 고독>이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이 작품은 토니 리처드슨 감독의 연출로 1962년에 영화화되기도 하였고, 같은 제목이 헤비메탈 밴드 아이언 메이든의 곡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빵집 금고를 턴 죄목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열일곱 살 소년 스미스는 소년원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새벽 5시에 들판을 가로지르며 두세 시간씩 달리기 연습을 한다. 얼마 후 열리게 될 전국 소년원 장거리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소년원 원장은 "우승을 할 것"과 "성실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만, 스미스의 머릿속의 계획은 다르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줄거리에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계획은 소설 초반에 일찌감치 공개된다.) 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아니지만, 1인칭 시점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되는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은 마지막까지 흥미로움과 긴장감을 끌고 나간다.

주인공 스미스는 달리는 동안 만큼은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소년원 바깥을 달리면서 달리기의 호흡만큼 숨가쁘게 "생각"을 펼쳐나간다. 천성적으로 삐딱하고 뻣뻣한 그는 아직 어리고, 인생 경험도 많지는 않지만, 생각과 주관이 뚜렷하다. 법 안에 있는, 그래서 법을 어떻게 해서든 유지하고 싶어하는 "작자들"과 법 밖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분짓고, 그 대치 관계를 명확하게 사고한다. 그 두 집단에게 "성실하다"라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일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은 언제까지나 "성실하게" 허튼 짓을 하면서 신나고 재미있게 살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 스미스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작은 승리를 이룬다. 비록 큰 승리는 아니지만,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승리임에 분명한 그것은, 법으로도, 감옥으로도, 어떤 형벌로도 결코 길들여지지 않을 스미스의 존엄성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 비해서 나머지 단편들은 좀더 우울하거나 어두운 편인데, 물론 노동 계급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밝고 가벼우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종종 화자로 등장하는 (스미스를 닮은) 어린 소년들의 호기어린 자신감이 이야기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노동에 시달리고, 전쟁에 징집되고, 가난에 찌들리며,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하고, 단절감과 고립감에 좌절하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단편마다 담겨있으며, 실제 경험에 기반한 앨런 실리토의 생생한 묘사가 마음을 파고든다. 앨런 실리토는 그다지 극적인 스토리 없이 일상적인 사건과 평범한 인물들을 그려내면서도, 외롭고 쓸쓸한 노동자에 대한 연민을, 물질적 가난에서 기인하는 정신적 삭막함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무력감과 절망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각 단편에서 각기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보여지는 다양한 노동 계급의 삶의 단면에는 치기어린 소년 화자의 낙관으로도 감출 수 없는 비애가 깃들어 있으며, <축구 경기>에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가정 폭력의 긴장감을, <짐 스카피데일의 치욕>에서는 계급 간의 몰이해가 가져오는 비극을 담는다. 마지막 단편 <프랭키 불러 쇠망사>는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의 청춘들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암울한 현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장거리 주자의 고독>에서 주인공의 매력은 눈앞의 불이익과 암묵적인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고집이다. "달리기"라는 행위가 가져다준 "자유로운 생각"에서 잉태한 그 고귀한 정신은 "절대 고분고분하지 않은 청춘"의 패기가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2011년 1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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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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