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에릭 로메르 등과 함께 누벨 바그 대표 감독으로 알려진 끌로드 샤브롤은 1995년 <의식 La Cérémonie> 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좌불안석하게 만드는 서스펜스이면서 고용주과 피고용인 또는 주인과 하녀라는 계층간 대립의 이야기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자'라는 열등감에 대한 지나친 방어와 신경질적 집착이 결국 비참한 파국을 불러 일으키고 마는 비극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그 여주인공이자 하녀인 소피의 이미지 때문에 아주 오싹해지지만, 한가지 의문점이 계속 머리를 맴돌게 된다. 남들에게 나의 '문맹'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인간의 윤리를 저버리고 그 모든 범죄를 저질러야 할 정도로 나의 자존감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훼손을 입히는 일인가, 왜 배우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 물론 여러가지 복합적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가지 의미가 튀어 나올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의문점을 지닌 채 같은 해인 1995년 발표된, 독일의 법대 교수이며 판사에 작가이기까지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를 읽었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그 자리를 맴돌 뿐이다. 다만 이번에는 다 읽고 난 후 '무지 無知 의 속성' 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참 궁금하다. "모른다"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지... 참 난감한 질문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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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블로그에서 <더 걸> 이라는 영화와 <더 웨이브> 라는 책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히 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전체주의나 파시즘의 속성에 대한 체험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 "늘 철저히 깨어 있으라, 그 수치스러운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라는 경고를 현재를 사는 독일인들에게 아주 강한 어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걸> 은 과거 나치에 동조하여 유대인 학살을 적극 도왔던 수치스런 과오를 애써 지우고는 오히려 反나치라는 탈을 쓰고 새로운 도시로 태어나려는 마을 사람들의 담합 그 자체에서 전체주의를 발견하고 저항하는 소냐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더 웨이브> 은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대해 배웠지만 정작 고등학생들은 얼마나 쉽게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빠져 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와 학생들의 교실 실험 이야기다.

'문맹'을 단순히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좀더 포괄적으로 확대 해석을 하면 결국 끌로드 샤브롤의 <의식> 이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더 걸> 과 <더 웨이브> 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함에서 비롯할 수 있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의 부재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정확한 현실인식과 깨달음의 경험이 없이 주입식으로 형성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비롯할 수 있는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의 부재와 실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드나 와튼 같은 명문 스쿨을 졸업하고도 버젓이 부정회계를 하고 개미 투자자들 속여가면서 주가조작하고 환치기하고 투기하는 이들에게서도 그러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읽고 쓰고 그래서 주입 학습되는 인간의 윤리의식 말고는 발견하기란 쉽지는 않으니까. 자신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그 작업에 대한 결과의 파급 효과를 거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노홍철의 "그냥 가는거야" 식은 사실 '문맹'상태의 무모함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만약에 당신이 하바드 스쿨을 졸업하고 어느 유명한 금융회사에서 외환 딜러로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수백억의 이익을 안겨주었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보면 善이지만 영역 바깥에서 보면 수많은 개미들이 자살을 했고 가족들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며, 다른 한 나라의 수많은 중소기업을 파산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을거다. 그걸 몰랐고 애써서 그것을 알게 되는 상황을 외면하다가 만약에 자신의 뛰어난 수완 때문에 자살한 한 남자의 부인이라도 우연히 만나서 밑바닥 처절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잠자고 있다가 깨어난 윤리의식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은가.

"난 몰랐어..." 애써 책임을 회피한다거나 나의 윤리의식에는 문제가 없다며 변명하면서 자신의 '문맹'을 치열하게 보호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게 용서가 되나. <의식>, <더 걸>, <더 웨이브> 같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더 리더> 는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몰랐다구? 웃기지 마라. 몰랐던 네가 바로 죄인이지..." 無知는 罪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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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지만 제기된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고등학생인 미하엘은 우연히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한나를 만나 性과 사랑을 알게 된다. 그는 고등학생답게 인간의 본능과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했다. 가장 순수하다.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위대한 걸작들을 소리내어 읽어 주었고 그녀는 그 텍스트가 만들어 내는 세계에 빠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한나가 떠나 버렸다.

법대에 들어간 그는 세미나차 나치 부역자 관련 재판에 방청객으로 참석하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피고석에 있던 떠나 버렸던 그녀를 발견한다. 그녀는 유대인 수용소 간수로 일하면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을 했었는데 폭격으로 수용소로 사용되던 교회가 불타는데도 왜 수용자들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냐는 추궁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미하엘은 그 순간 눈물을 흘리고 만다. 소설에서는 미하엘의 심적 혼돈을 꽤나 담담하게 약간은 드라이하게 기술하지만, 영화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난 이 눈물의 이중성에 가장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함께 간수 일을 했던 당시 동료들이 모든 책임을 한나에게 뒤집어 씌우는 중상모략의 상황에서조차도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지 방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시인하고 만다. 문맹자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맹'사실이 공개되는 수치스러움 대신 종신형의 감옥살이를 기꺼이 선택하고 만다.

미하일에게는 자신의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함께 나누었고 책을 읽어주었던 그녀였다. 독일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법학도로서 그녀의 '문맹'을 넘어선 포괄적인 '無知'와 윤리의식의 부재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수치스러움을 보호해주고자 한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그녀에게서 가장 순수한 사랑과 끔찍할 정도의 윤리의식 부재의 혼재를 경험했을 것 같다. 정말 혼돈의 상태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사실 나에게는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 같다. 이미 너무 혼란스런 문제가 제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책을 통해 어느정도 확신하게 된 것은 가장 순수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대상에서 윤리의식을 따진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만약에 내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심각한 의식의 결여가 있음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큰 상실감에 빠질 것이며, 순수했던 시절과 현재의 그 크나큰 괴리감이 얼마나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인가, 라는 부분이다. 소설에서는 그 트라우마에 대한 묘사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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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가 교도소로 들어간 이후부터는 나는 소설에서 로맨스 부분은 과감히 들어내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소설의 로맨스 즉 주인공 한나와 그녀의 꼬마 미하엘과의 그 오랜 사랑의 이야기는 전체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대단히 중요한 원동력이었지만 이것은 상대적으로 한나의 '문맹'과 그것에서 비롯한 윤리와 책임의식의 부재 부분을 더 부각시킨다. 그래서 그녀를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을 만들도록 한다. 그들의 로맨스와 그녀의 문맹은 전체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쌍두마차였던 셈이지만 나는 한마리를 떨궈낸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미하엘과 한나의 로맨스 비중을 대폭 낮추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소설이며 난 작가가 어느 정도 "깨어 있으라"는 메세지를 넣고 싶었다고 판단하는 편이고, 로맨스를 함께 엮은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이자) 은유법으로 본 것이다. <더 걸>, <더 웨이브> 가 나치에 동조하여 유대인 학살을 도운 것을 거대한 '문맹'으로 보고 속지 말고 정신차리기를 직설 또는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과 비슷하게 <더 리더> 를 읽은 것이다.

옥중에서 노년을 맞은 한나가 이제는 중년이 된 미하엘이 녹음하여 보내주는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문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게 되고 읽고 쓰는 법을 깨우쳐 가는 과정은 <더 걸> 에서 소냐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의 위선을 파헤치고 거짓말을 밝혀내는 과정과도 흡사해 보이며 <더 웨이브> 에서 로스 선생이 점점더 전체주의 집단으로 성장하는 공동체 더 웨이브 단원들을 깨우치려는 노력과 흡사해 보인다.

한나가 감옥에서 수용소 감시 보고서와 유태인 학살 관련된 책을 읽었다는 내용이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에서 제외된 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가의 문제제기에 대한 일종의 작가 자신의 해법 제시일 뿐이고, 스티븐 달드리는 그 해법에 대한 고민을 그저 관객 한사람 한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닐까 싶다는 거다. 소설에서의 메세지 전달을 위한 직설화법보다는 좀더 근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심각한 고민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뭔가 한가지를 "안다"는 것은 실은 그렇게 단편적인 지식의 습득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이 문맹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하고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윤리의 개념이 뭔지 모르고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음이 진짜 문맹이라는 것을 깨달야 한다는 문제의 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시절의 사랑과 윤리 의식의 부재를 결합하여 그 심리상태를 꽤나 건조한 문체로 기술해 나가는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한다.


2009년 4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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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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