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영화, 그 비밀의 언어(1994)라는 영화서적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 영화에서 '다음날' 이란 전달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다. "

나레이션이나 자막을 써서 전달하자니, 이미지가 아니라 언어에 빚을 지는 것이라 싫고, 달력, 수탉, 태양, 신문배달부, 쓰레기차 같은 진부한 이미지들은 쓰기 싫고. 그러면, 이미지만을 이용해서 어떻게 다음날이라는 것을 비교적 신선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은 현실의 시간적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 연출자 제각각의 독특한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게 되며, 보통 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의 추리를 통해 지각하게 됩니다. 무간도나 LOST 같은 작품은 이 부분에 있어 언어적 설명은 없지만 비교적 친절하죠.

그렇다면, 과연 '두려움'이란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손에 쥐어진 건 단지 이미지들 뿐이라면... 그리고, 그 두려움이란 것이 한 여자 배우가 상대 남자배우와 감정적, 육체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면서 느끼는 심리적 혼돈이라면...

David Lynch 의 <INLAND EMPIRE 2006> 는 이 두려움과 심리적 혼돈을 이미지의 예술인 영화 안에서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그 본질을 두고 있습니다.



즉, 포스터에 적혀있는 대로 A Woman in Trouble 가 이 영화의 키워드인 셈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잠깐 고민을 좀 해보죠. 어떤 고민인가 하면,

당신은 가정이 있지만 우연히 만난 어떤 남자에게 감정을 느낀다고 말이죠. 그 남자는 아내와 아이도 있지만, 여성 편력이 심할 정도로 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 남자와 만나서 남몰래 로맨스를 즐기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혹시 남편에게 들키지 않을까, 그래서 두들겨 맞지는 않을까... 아니면 그 남자의 아내에게 들켜 그녀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까...

내 자신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아슬아슬한 두려움과 이 두려움이 발전해 스스로 타락한 여인이라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하고 이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되며, 이것들은 이제 늘 당신의 마음에 상주하여 당신의 심상에 빈번히 교차하며 등장합니다. 이 심상은 과거 현재 미래 시간 순으로 편집되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죠.

그럼 다시, 이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남자의 아내이자 헐리웃 스타이기도 한 여주인공 니키는 어떤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는데, 아내와 자식이 있는 매력적인 상대 남자배우에 대해 그만 감정을 느끼게 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됩니다. 그 어떤 영화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만난 두 배우가 감정적 선을 넘게 되고, 피살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고, 다시 리메이크되는 영화이기도 하죠.

그녀는 스스로를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과 동일시하며 겪게 되는 정신적 혼란과 현실과 영화 사이를 넘나들며 감정적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맸던, 그리고 창녀의 것과도 비슷한 헐리웃 영화판의 여배우로써의 삶에 대한 측은함까지 더해져, 미궁에 빠진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3시간의 러닝타임 중에 2시간 30분 이상이 이 부분에 할애되고 있기도 하죠.

그, 심적 두려움의 변화의 복잡도가 상상이 가십니까? 저는 바람을 피운 여인의 두려움에 몰입하여 이 영화를 보았는데, 데이빗 린치가 따라간 여인의 즉흥적 이미지의 2시간 30분의 순간순간이 계속 충격적이더군요. 아마 이 영화가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 전개의 흐름을 따라갔다면, 아마도 그냥, 불륜을 다룬 흔해빠진 드라마가 되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즉흥적 이미지의 연속을 그 이미지에 대한 언어적 설명없이 본다면, 그녀의 즉흥적 두려움과 공포를 쫓아가야 하는 관객 스스로 발생시키는 혼란이 가중되므로, 아마도 이 영화 자체가 혼돈스러움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처럼 바람피운 여인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한 방법일 듯 싶구요.

니키 역의 로라 던의 얼굴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웃을 때조차도 슬퍼보이고, 찡그린 얼굴은 보는 사람의 표정을 함께 일그러뜨릴 정도입니다. 그런 로라 던이 데이빗 린치 영화의 단골 배우가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르죠.


헐리웃과 여배우, 혼돈과 악몽에 대한 탐구인 전작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에서 그나마 있는 헐리웃 영화적 요소의 덩어리를 싹 들어낸 다음, 빈 공간을 인디펜던트 스타일로 채워, 여배우 로라 던을 정면에 내세워 다시 혼돈을 헤매는 영화가  INLAND EMPIRE 입니다.

드라마 트윈 픽스 시절에 열광하긴 했었지만, 왠지 멀미가 나고 메스껍게 만들곤 하는 데이빗 린치의 일련의 영화들을 그다지 썩 좋아했던 건 아닙니다만, 이레이저 헤드는 다소 흥미롭게 보았습니다만...

최근작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에서 보여 준 연출을 보고는, 이 사람은 관객을 미궁에 빠뜨리는 복잡한 심리 묘사에도 물론 탁월하지만, 어딘지 굉장히 경박하면서 기괴한 미국의 쇼비지니스 세계를 참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감독이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죠. 영화에 삽입된 I've told every little star 를 들으면 관련 장면에서 느꼈던 creepy 한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헐리웃의 영화 제작자들과는 타협하기 정말 어려울 것 같은 난해한 영화 스타일을 가진 그가 이제 디지털 필름으로 완전히 돌아서서, 감독, 각본, 제작, 촬영, 편집, 음악까지 도맡아서 제작한 <INLAND EMPIRE> 는, 미리 완성된 대본 없이 즉흥적이고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제작됨으로써, 그의 영화적 상상력이 맘껏 발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지만, 관객들이 두통과 어지러움, 그리고 혼돈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이 영화의 핵심이자 의도인 것 같긴 하지만...


2007년 8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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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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