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PBOY's JAZZ BAKERY


수년 전에 짧은 유럽여행 중 프랑스 파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세느강 주변에 위치한 루브르, 오르세 박물관과 시내에 퐁피두 센터 말고도 작은 골목을 찾아 들어가면 피카소 박물관이라고 있는데, 조금 헤매면 찾을 수 있죠.

프랑스 파리 피카소 박물관에 가서 본 그림 중에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때 피카소가 한국과 관련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기도 했고...

                         Massacre en Corée, Pablo Picasso, 1951

한국전쟁 중 자행된 부녀자 학살과 전쟁의 비극을 그려냈던 것이라고 하네요. 피카소는 그 14년전에는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통해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그린 바 있습니다.

                             Guernica,  Pablo Picasso, 1937

그런데,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이유를 아시나요? 게르니카는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몰아 넣은 군벌에 대한 혐오의 표현이라고 하죠. 여기서 군벌은 히틀러의 독일 나치 정권 (1933~1945) 과 프랑코의 스페인 독재 군부세력 (1939~1975) 을 말하는 것이며, 그림에도 이들을 표현한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 그 해석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음.

1937년 4월 독일 공군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몇십톤의 폭탄을 무차별 투하하여 민간인 대학살 참극을 벌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무기를 테스트하는 데 스페인의 한 작은 도시를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글쎄...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했는지...?


스페인 내전 이전 상황

귀족과 부르조아의 입헌군주제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공화주의자들의 혁명이 있은 후, 1873년 드디어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고 제1공화국이 탄생합니다만,

1874년, 1 년도 못채우고 내분과 군부개입으로 공화정은 붕괴되고 정치와 사회구조의 개혁은 모두 물거품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봉건세력과 부르조아는 카톨릭을 국교화시키며 왕정 독재를 복고시키죠.

그후 만성적인 정치,사회적 위기가 지속되는 상태에서 세계를 몰아친 경제공황의 여파는 스페인에서도 군주제, 군사독재가 모두 붕괴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1931년 선거에서 공화파와 사회당이 승리하며, 58년만에 제2공화국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다시 개혁의 바람은 불어 공화파와 사회당은 개혁의 고삐를 당기지만 富를 독점하고 있던 카톨릭신자의 기득권층과 교회세력, 지주 봉건세력 등은, 교회개혁, 토지 개혁, 지방 자치 확대, 조세 제도 개선, 여성 투표권 부여 등을 아주 싫어했고, 결국 개혁때문에 스페인은 좌우사상 대립 두 진영으로 극명히 분리되는 꼴이 되어 버리죠. 게다가 공화파에는 무정부주의자부터, 온건 및 급진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항상 내부 갈등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농민들의 반정부폭동 등의 정치불안을 이용하여 득세한 스페인 우익연합과 공화우파가 1933년 총선에서 정권을 빼앗고 개혁을 또다시 원점으로 돌려 놓게 되고, 인민전선을 결성한 좌파연합은 1936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 과감한 개혁조처를 단행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사회혁명을 원했는데, 이것은 사회개혁을 저주하던 봉건세력 등의 우파의 단결력을 더욱 높이게 되었고, 급기야 1936년 7월, 파시스트 집단인 국민파로 하여금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말죠.


스페인 내전

국민파의 지휘권은 곧 프랑코에게 넘겨졌지만, 반란군은 단시일내에 권력을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공화파 정부군도 반란진압에 실패함에 따라, 이 구데타는 33개월을 질질 끌며 비극의 스페인 내전으로 비화되고 맙니다.

프랑코 세력은 농촌지역을, 공화파는 마드리드 등의 도시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모든 도시와 마을이 특정 정치 세력의 진지가 되고 격전장이 되었고, 마을의 점령자가 바뀔 때마다 부역자 색출작업, 보복과 처형이 뒤따랐습니다. 프랑코 세력은 시민을 학살했고, 공화파는 교회를 불살랐는데, 6.25 때 마을을 점령한 세력이 바뀔 때마다 겪어야 했던 반목과 비극과도 유사하죠...

그런데, 이 내전은 그냥 내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국민파와 공화파 모두 외국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나치즘의 독일과 파시즘의 이탈리아는 군대, 탱크, 비행기 등을 국민파에게 보냈는데, 이들은 이 스페인 내전을 신무기를 테스트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공화파측 지원도 있어서는, 소련과 50여 개국의 민간인들의 지원, 그리고 스페인의 개혁을 지지하고, 나치즘과 파시즘을 저주하던 전세계 지식인들이 스페인으로 몰려 4만명 이상의 다국적 전투원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민병대로 참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열강들은 불간섭 협정을 이유로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지 않았고, 너무 다양한 사상의 세력이 모인 탓인지 공화파 내분도 발생하여, 결국 공화군은 1939년 3월 최후의 보루인 마드리드를 프랑코 세력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이미 그 전에 프랑스와 영국은 프랑코 정부를 승인했고, 곧 이어 미국도 승인하죠...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

1939년 4월부터 스페인은 프랑코의 독재의 암흑기로 접어 들게 됩니다. 폭정을 지향했고, 모든 불순분자를 쓸어버렸으며, 수십만의 반대파를 체포,투옥, 그리고 수만명을 처형시켰으며, 모든 개혁과 법률을 무효화시키고, 스페인을 군인과 성직자와 지주 중심의 사회로 만들어 놓습니다.

반대파를 무차별적으로 제거하여 1939년 종전 이후 4년간 3만 7천명이 처형될 정도로 폭정을 펼친 프랑코가 1975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은 그의 독재 치하에 있었습니다.

1975년부터는 좌우 양파의 신경전이 지속되지만, 모든 것을 잊기로 하자는 협정을 통해, 1982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스페인은 드디어 민주화되고 EU에도 가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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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7월부터 1939년 4월까지의 스페인 내전은 총 100만명의 인명을 앗아갔으며, 해외추방 30만명, 종전 후 숙청 5만명에 이르는 20세기초 가장 처참한 전쟁으로 기록됩니다.

허망한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나고 만 이 내전에,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고 나치즘과 파시즘을 강하게 비난하며 전장에 뛰어 든 전세계 젊은 지식인들에는,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총을 들고 싸운 경험을 토대로 카탈로니아 찬가 를 쓴 조지 오웰, 전투를 치루며 틈틈히 희망 을 썼다는 앙드레 말로, 역시 자신의 전장에서의 열정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에 담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포함되어 있고,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렸습니다.

켄 로치는 참전한 민병대 간의 사상대립에 초점을 맞춘 랜드 앤 프리덤을 연출하였으며, 멕시코 영화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는 이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스페인 내전 이후의 아픔을 담은 <판의 미로> 를 연출했구요... 어린이의 시각으로 스페인 내전을 바라본 또 하나의 영화 Víctor Erice 의 벌집의 정령도 조만간 그 감상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DVD 가 날아 오고 있는 중이라서...

<판의 미로> 메이킹 필름에서 감독은 용기에 관해 이야기를 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요. 죽음과 고문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산속의 반군을 돕는 지원 활동을 계속한 의사와 하녀 메르세데스에게 어쩌면 스페인의 용기가 있었고, 미래의 희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내용은 이영재가 쓴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의 8장과 인터넷의 여러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2007년 7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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