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란 원래 ou(없다) + topos(장소) + ia (나라) 가 합쳐진 말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의 국민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전인적인 생활을 즐긴다. 공평하게 일하고, 필요한 만큼의 소득만 얻고, 여가시간도 충분히 가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기에 남보다 더 일할 동기도, 필요도 없는, 완전한 평등사회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이상사회가 "꿈꾸는 것"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현실세계에서는, 20세기의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현재 진행중인 자본주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방향으로 보이는 곳을 계속 향해가는 중이다. 하지만 픽션에서는 우리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꾼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뒤,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아직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시기, 우주 행성을 개조하여 원하는 기후로 만들 수 있는 정도의 기술문명을 갖춘 미래가 도래했을 때, 사람들이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여 유토피아를 실험한다" 라는 소재는 SF소설로서는 매우 매력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유토피아" 선집을 기획한 Orson Scott Card (<엔더의 게임>으로 유명한 SF 작가)가 마이크 레스닉에게 단편 하나를 부탁했을 때, 레스닉은 평소에 그가 잘 알고 있는 아프리카 사회를 토대로 한 유토피아를 구상했다. 그리고 그 단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10개의 연작으로 발전했고, 그걸 엮은 것이 이 소설, <키리냐가>이다. (안타깝게도 한글판은 품절임.)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나머지 8개의 에피소드는 유토피아를 목표로 건설된 새로운 행성, 키리냐가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에 묘사된 지구의 미래는 예상보다는 덜 암울한 미래로, 산업화와 기계화가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우주 여행이 가능해진, 하지만, 테크놀로지가 장악한, 그래서 불가피한 환경 오염이 공존하는 미래의 지구이다.

2123년, 한 무리의 케냐인들이 서구화된 문명과 환경파괴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생활양식으로 회귀하고자 인공적으로 조성된 키리냐가 행성으로 이주하게 된다. 키쿠유 부족의 옛 영토 이름을 따서 "키리냐가"라 명명된 이 행성에서 이들은 키쿠유 부족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로 한다. 행성의 건설이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힘으로 가능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유토피아가 되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는 단순한 물리적인 환경 조성보다 훨씬 더 막중하고 어려운 것임에 분명하다.

외부의 간섭없이 독립적인 세계를 유지한다는 협정과 함께, 이 새로운 세계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절대적 원칙은, 그 어떤 구성원이라도 키리냐가를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집단을 이끄는 주술사(witch doctor), 코리바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다. 코리바는 한때 캠브리지와 예일에서 수학한 엘리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구 문명을 혐오하며, 뼛속까지 키쿠유의 기질을 지닌 완고한 노인이자, 부족을 인도하는 현인이다. 그는, 아픈 이가 있으면 간단한 치료를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을 중재하며, 주문과 부적을 이용하여 주술을 행하는 두려운 존재인 동시에, 고대에서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우화가 늘 샘솟는 이야기꾼으로서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사실 이야기와 우화들은 그가 부족을 가르치고 이끄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각 에피소드마다 한두 개씩 등장하는 옛 우화는 부족민들이 스스로 교훈을 깨닫고 판단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철학적인 또는 상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현대 의학의 힘을 빌어 수명을 연장하는 것 중에 어떤 쪽이 나은가?

당장 내 앞에 닥친 문제가 되면 누구나 의학의 힘을 빌고 싶어지겠지만, 지구상의 인구의 폭발적 증가라든가, 노화를 거스르려 하기까지 하는 인류의 욕망을 돌아보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다. 코리바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우물이나 저수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고, 강에서 물을 길어 오는 번거로운 방식을 고집한다. 자원을 손쉽게 얻게 되면, 쉽게 낭비하게 되고, 그러면 곧 고갈되고 만다는 그의 주장은 물, 석유 등을 비롯한 천연자원들의 고갈이 멀지 않은 지구를 돌아보게 만든다.

***

이 소설은 내용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키리냐가를 배경으로, 또는 우화 속의 세계를 비유하면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보편적인 주제들을 논하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남은 질문은 다음 두가지이다.

첫째는, 유토피아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사회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인간의 탐욕은 남보다 좋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만들고, 인간의 혈기는 풍족하고 안정된 사회를 권태로운 것으로 느낀다. 완벽해 보이던 키리냐가를 조금씩 무너뜨린 것도 이런 요소들이었다. 한 사회가 성장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부로부터의 변화이든, 외부로부터의 변화이든 간에 변화하는 유토피아가 여전히 유토피아로 남아 있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결국 유토피아는 건설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과거의 여러 국가들이 스스로 붕괴하거나 외부로부터 붕괴된 예는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토피아란, 지속가능한 유토피아란 불가능한 것일까.. 키리냐가가 조금씩 균열되고 붕괴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양성의 거부"에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이민자들, 관습에 저항하는 소수의 내부인들, 동시대에 존재하는 다양성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시간에 따른 변화에 대한 거부. 반항기를 겪는 새로운 세대에 의한 변화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던 키리냐가는 구성원들의 저항과 이탈을 계속 겪게 된다. 다양성에 대한 허용이 전통과 관습을 파괴하리라 생각했던 코리바는 점점 전체주의스러운 고집을 부리게 되지만, 다양성이 초래한 변화는 점점 확산되어만 간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볼 때, 다양성의 존중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다양성을 모두 허용하면서 평등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과 조금만 다른 것에서도 차이를 발견하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다양성을 받아들인 키리냐가가 유토피아로 남아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족은 풍족함 속에서 권태를, 안정 속에서 자살 충동을 느끼는, 지극히 참을성 없고 변덕스런 종족이기 때문에 이상사회 건설 자체가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역사상으로 볼 때, 남을 억압해서라도 자신이 풍족해지기 위해 노예제를 활용했고, 자연을 파괴하더라도 과잉 생산, 과잉 성장을 계속해온 인류는 어쩌면 저주받은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의 좀더 현실적인 질문은, 아프리카에의 원조가 서구문명의 전파와 함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인가? 물론 당장 굶어 죽거나, 사소한 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에게 인도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전파되는 서구화와 문명화가 그들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 것인가? 당장에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 만연하는 내전이나 부패, 폭력 등을 본다면, 그들을 black Europeans으로 만들어 도시를 건설하고, 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이 전통을 지켜나가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키리냐가에서 묘사된 미래의 서구화된 케냐는, 맹목적으로 서구 문명에 동화되어 의식주를 포함한 자신의 고유 문화를 다 잃어버리고 만 채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서구 문명의 식민화, 또는 세계화의 영향 하에 놓인 아프리카나 아시아, 남미, 어떤 배경으로 바꾸어도 의미심장한 비유가 된다. 강대국의 문화에 흡수되어 자신의 전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과연 경제성장과 맞바꿀 만한 일인가 하는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남미 일부 국가들에서 벌이고 있는 "지속가능한 성장 모델"에 대한 실험, 즉 맹목적인 경제 성장이나 경제적 종속이 아닌, 그들 고유의 발전 모델을 찾아가는 시도들처럼, 제 3세계에 인도적인 도움을 주면서도,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소설로써 철학을 하고, 우화로써 성찰하게 만든 이 소설은 나에게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준 영리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찡한 슬픔을 주기도 했다. 바로 세번째 에피소드인 For I have touched the sky 를 읽으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왔다. 키리냐가가 과연 유토피아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장 크게 주었던 에피소드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코리바에게 완벽해 보였던 키리냐가를 유지하는 규율들이 여성들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자유를 억누르는 사회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 없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를 우리 안에 가두어 두는 사회가 유토피아가 될 수 없듯이.


2008년 1월 14일 작성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bopboy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