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건 영화건 (심지어 음악에서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거리를 유지하기 보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독자를 집적 끌어 들이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그 현장으로 들어가 주변 인물들의 심리 상태와 행동 변화를 체험하는 식으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거다. 게임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의 <Halo> 같은 방식을 좋아 한다. 화면은 일종의 눈이 되고 화면 안은 나의 시야가 된다. 그래서 그 안에는 내가 있으면 안된다. 관찰자 시점은 내가 마치 누군가를 조정하는 것 같고 남의 일 들여다 보는 것 같고, 총에 맞아도 내가 죽었다는 느낌이 별로 안든다.

그래서일까 카메라 자체가 1인칭 주인공이 되고 렌즈가 나의 눈이 되어 지금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라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쥬 (Hermitage) 박물관 곳곳을 돌아 다니며 왕궁 속 로마노프 왕조 시대와 아나스타샤가 추는 춤이라도 살짝 엿보게 해주려는 듯이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하게 만드는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안 방주 Russian Ark, 2002> 같은 영화의 스타일을 아주 맘에 들어 한다. 생각해보라. 카메라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에서 커트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지... 그래서 이 영화는 단 한번의 편집도 없다 96분 동안. 그러니까 96분짜리 One Take 다. 조만간 이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생각이다.


사실 세상을 바라 보는 현실의 1인칭인 나의 눈에 들어 오는 이미지에는 커트라는 것이 없다. 우리의 뇌는 편집이라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기억되지는 않기 때문에 기억에서 사라지는 이미지가 발생하고, 살아 남은 이미지를 엮는 과정에서 뇌는 실제로 본 이미지가 아닌 어떤 새로운 영상을 편집해 내는 것 같다. 편집이란 필연적으로 왜곡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그래서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추리 소설의 재미는 사건이 발생하고 해결되는 그 줄거리 자체보다는, 범인은 범죄의 그림을 쪼개어 퍼즐 조각으로 만들고 형사는 그 조각을 모아 범죄의 그림을 다시 복원하는 그 분해와 조합의 스타일에 있을 거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분해와 조합에 어떤 트릭이 사용되었냐라는 것인데, 이 트릭은 아마도 뇌의 이미지 재편집 기능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형사가 사람들의 그 완벽하지 못한 기억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하나의 가상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사실 작가의 외줄타기 곡예 같은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추리라는 것은 단순한 직소 퍼즐 맞추기일까 아니면 기억의 재편집을 통한 창작같은 것일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남겨진 몇가지 단서를 조합하여 그 범인을 추정해 내는 과정... 조합의 대상이 되는 그 단서들은 서로 꼭 들어 맞아야 하는 퍼즐 조각인지 아니면 새로운 창작을 위한 재료에 불과한지 알게 뭐냐는 거다. 새로운 창작이면서도 서로 꼭 들어 맞는 퍼즐 조각같은 것도 있지는 않을까? 어려운 문제다.

한때 <명탐정 코난> 이나 <소년 탐정 김전일> 같은 만화를 열심히 본 적은 있어도, 추리 소설은 관심은 많지만 그렇게 많이 읽지는 못한 편이다. 사실 다른 장르의 다양한 소설들 또한 그렇게 많이 보는 편도 못 된다. 아마도 개인적인 취향의 편협함 때문에 나 스스로가 선택의 폭을 좁혀 놓은 탓이겠거니 한다.

게다가 다수의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는 그것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 알고 있으면 좋을 배경 지식이라는 부분이 있다. 스파이 소설같이 그 안에서 인물과 사건이 배경과 유기적으로 잘 조여진 작품의 경우 특히 더 그러할 거다. 그래서 잘 모르면 지금은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읽지 않고 그냥 간직하고 있는 "읽고 싶은" 책들이 꽤 많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 를 보고 나서 제이슨 본 뒤에 있는 CIA 에 관한 지식 부족의 한계를 느껴서 이전의 CIA 를 다룬 영화를 몇편 보기도 하고 책도 좀 본 적이 있는데, CIA 가 뭐하는 집단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시리즈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 좀 무리다.

그래도 나름 용기를 내어 최근에 읽은 <이와 손톱> 과 <용의자 X의 헌신> 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사 과정에서 발견되는 단서들을 통해 퍼즐 조각들이 딱딱 들어 맞게 조합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은 원래의 것과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만약에 범인이 의도적으로 그런 단서를 남기거나 그림의 조각을 분해한 것이라면 범인은 천재형이라는 말인데, 이 경우 형사들은 뻘짓을 하거나 아전인수 격의 수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살인 사건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이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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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 은 두가지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다. 한 살인 사건과 용의자를 두고 법원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옥신각신하는 이야기가 하나이고, 한 떠돌이 마술사가 아내를 죽인 정체불명의 위조지폐범을 추적한다는 이야기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3인칭 시점이고, 후자는 1인칭 시점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는 떠돌이 마술사가 되어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추격자가 되지만, 법원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한 방청객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어 나가면서 이 두가지 이야기의 접점에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라는 기대와 그 연관성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이 책은 결말 부분이 검은 종이로 봉인되어 있는데 병렬식으로 각자 진행되던 그 두 이야기의 접점과 떠돌이 마술사의 트릭이 들어 있다. 그 트릭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단서는 남기되, 퍼즐 조각 조합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스토리가 나오게 끔 하는 것이다. 어지간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의 결말 예상도 가능하다. 나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트릭은 모르겠지만 혹시? 하는 추측 정도가 들어 맞기는 했다.

난 솔직히 이 결말 부분을 읽고 조금 당황했다. 재판장에서 증인들을 통해 얻은 증거들을 가지고 용의자를 심문하던 검사마냥 앞뒤를 딱딱 들어 맞게 복원해 낸 퍼즐의 추리 그림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실제의 상황과는 예상대로 꽤 다른 것이었긴 했는데,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예상이 꽤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약간 헛헛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면, 재판 장면이 현재 진행형으로 기준 시점이 되고, 그리고 누군가의 회상으로 그 떠돌이 마술사였던 시절의 복수의 여정을 중간 중간 플래시백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음... 그러자면 관객이 등장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시점 관리에 조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고, 재판장에서 나온 증거를 토대로 검사가 그린 그림의 완벽성에도 신중을 기해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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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에서 이토록 장황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용의자 X의 헌신> 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은 현재 국내에서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가장 인기있는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라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기도 하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을 완전범죄로 보이게 하려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의 완벽한 트릭이 소개된다. 사실 끝까지 읽고 나면 그것이 과연 트릭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 의문의 관점에서 이 소설을 다시 보면 이것이 과연 추리소설일까 싶기까지 하다. 이 천재 수학자는 많은 단서들을 의도적으로 남기고 형사로 하여금 트릭의 쳇바퀴를 돌게 한다. 아마 그의 친구인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아마 완전범죄가 되었을 거다.

완전범죄라고?  하지만 그런 것이 존재할까?  "죄를 저질렀다" 라는 것을 판단하는 주체에 관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완전 범죄란 그저 경찰을 속였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그건 살인 지침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살인자가 악마냐 아니면 인간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라는 거다.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악마라면 완전범죄라는 것이 통할 지 모르겠으나 죄의식을 느끼는 인간이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는 다르다.

<용의자 X의 헌신> 은 정말 복잡한 소설이다. 내용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진다는 말이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고마움, 사랑, 두려움, 죄의식, 순수, 논리의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표면으로는 사건이 발생하고 완벽한 알리바이와 트릭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풀어내고 단서 조각들을 찾아내고 퍼즐을 조합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흐르지만, 그 내부에서는 사랑, 희생, 두려움, 배신, 죄의식, 절망 같은 인간의 감정의 조각들이 수학자 스스로 만든 논리의 틀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깨져 가는 과정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다보면 그 사건의 모든 내막이 드러나는 결말 부분을 알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인물의 감정과 심리 상태 변화가 더 궁금해져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마치 뭔가를 풀어내야 한다는 수학적 논리에 억눌려 있었다는 듯이 우리의 감정은 이내 폭발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깊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는 그 카타르시스가 대단하기까지 하다.

나는 마지막 쪽에서 약 50 쪽 전에 유가와가 이 트릭을 풀어 낼 단서를 어떻게 찾아 냈는가를 형사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망치로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시가미가 머리숱도 많고 젊어 보이는 유가와를 부러워 한거다. 세상의 가장 어렵다는 수학의 난제를 푸는 것이 삶의 유일한 기쁨이요, 겉모습같은 부분은 일체 신경도 쓰지 않던 이시가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지금까지 트릭을 풀어내는 추리의 과정이라고 믿었던 이야기가 실은 이시가미의 헌신적 사랑에 관한 기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트릭이라는 것이 하나하나 밝혀질수록 그것은 그의 세심하고 치밀한 수학자로써의 사랑의 방식이 밝혀지는 것이기도 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한 남자의 사랑에 관한 짧은 기록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반전이 또 있을까?

이시가미는 뚱뚱한 체형에 크고 둥근 얼굴에 실처럼 가느다란 눈과 짧고 숱이 적은 머리를 가진 천재로 형편이 여유치 않아서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된 인물이다. 솔직히 난 이시가미의 외모가 이 소설에 부여하는 그 무게에 정말 기분이 착잡했다. 세상의 모든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도 자신에게 별 관심도 없어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그 전에는 몰랐던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의 그 무기력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수학의 천재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수학의 천재가 아니어도 좋아. 조금만 더 나은 외모이기만 했어도 참 좋았을 것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참 몹쓸 것이 어쩌면 뷰티 마케팅 같은 외모 지상주의겠구나...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잔인한 것이 그 외모가 어쩌구 저쩌구 이야기 하는 것이겠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빠 닮았어 엄마 닮았어?" 하며 외모에 관한 이야기를 툭 내뱉지만 아이들은 이때부터 그 외모 선입견의 희생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아름다움을 인지할 텐데 자신의 외모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고통은 알게 모르게 클 거라는 거다.

각종 뷰티를 선동하는 미디어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외모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훈육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 선입견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거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 어떤 가치가 의미가 있을까? 한마디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생각이 이런 부분에까지 이르자 나는 참 세상이 슬퍼졌고 천재가 슬퍼졌다.

안타깝게도 그 천재적인 두뇌에서 나오는 헌신과 보호를 그녀는 받아 들일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그가 나에게 평생 족쇄를 매달아 놓는 것은 아닐까 의심까지 하며, 현재 만나는 그 근사한 남자 구도를 더 이상 못 만나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결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도록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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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처럼 살인과 사랑의 이중주라는 설정은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한편 속에도 담겨져 있다. 국내에는 <살인 혐의>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빠트리스 르콩뜨 감독의 1989년 작품 <므슈 이르 Monsieur Hire> 가 그 영화다. 난 예전에 비디오로 보았는데, 아마존 등에 DVD 가 나와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도 키가 작고 뚱뚱하고 둥그런 얼굴에 숱이 없는 한 남자 이르와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이르가 짝사랑하는 한 젊은 여자 알리스가 등장한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이르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용의자 X의 헌신> 에서는 그 모녀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가 진행되지만, <므슈 이르> 에서는 이르가 처음부터 용의자로 지목된다. 외모와 성격에 대한 선입견이 크게 작용을 한다. 말이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그 외모 때문에 주민들은 이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르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건너편 아파트에서 발생한 그 살인 사건을 목격한 인물이고, 그 살인 사건은 그가 사랑하는 알리스의 애인인 에밀이 저지른 것이었다. 이르는 자신이 강력한 용의자로 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녀의 애인에 관해서 경찰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용기를 내어 알리스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을 하고 그 사건을 목격했음을 함께 고백한다. 그리고는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알리스는 처음에는 망설이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애인인 잘 생긴 에밀을 선택하고 만다. 그리고 이르의 자신에 대한 감정과 목격 사실을 역이용해서 오히려 그를 범인으로 몰고 이르를 배신하고 만다... <용의자 X의 헌신> 과 함께 한번 구해서 보아도 좋을 듯...

<므슈 이르> 는 <용의자 X의 헌신> 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외모에 대한 세상의 선입견의 피해자들이 살인이라는 가장 끔찍한 범죄 속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어떻게 지키려고 하고 있는지 두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2008년 5월 1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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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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