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존스 제3의 물결 The Third Wave by Mr. Jones
The Wave 파도  에 이어서...

The Third Wave by Mr. Jones 이라는 이야기는 1981년 미국에서 ABC 에 의해 짧은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되고, 이 드라마는 곧 이어서 뉴욕 출신 작가 토드 스트라써에 의해 책으로도 만들어진다. 그 드라마도 최근 보았는데, 누군가 비디오로 녹화한 방송을 DVD 로 구운 것 같은 수준으로 아주 오래된 영상자료 보는 것 같다. 헛, 이런 것도 유통이 되는구나...

40분 약간 넘는 분량의 이 드라마는 The Third Wave by Mr. Jones 에 담겨 있는 너무 많은 내용과 생각들을 사건 위주로 한꺼번에 짧게 압축을 하는 바람에, 몇가지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기승전결을 끌어가는 내러티브의 힘이 딸린다. 주로 벤 로스 선생님 위주로 보여 주고 있다.

팩션 (Faction) 이라기보다는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 한 고등학교에서 '체험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어떤 교실 실험이 있었다', 라며 사건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올해 초 독일에서 개봉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DIe Welle 2008> 은 적어도 그런 불만은 해소시키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한 자극을 관객에게 가한다, 라고 말하는 게 솔직할 것 같다.

어쨌건 드라마를 보고 나니, 토드 스트라써가 남긴 <The Wave> 에 대해서 앞으로 좀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더 끄적이기로 했다.



무슨 시놉시스 뽑아낸 것처럼 후루룩 지나가는 드라마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의미는 꽤 크다. 같은 나라 안에서 또는 바깥에서 쇼아, 홀로코스트, 대학살이 벌어지는데도 그것을 방관하거나 또는 동조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라는 과거의 역사를 그저 '지나간 과거' 라고 착각하는 그리고 잔소리 싫어하는 아이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서 어쨌건 TV 드라마에서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에 나치가 이런 일을 했단다, 라며 역사 시간에 아무리 교사가 떠들어 댄들 그저 단순 강의로는 그게 정말로 어떤 것인지 애들이 피부로 느끼듯이 그 실체를 파악할 길이 없다. 그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 지금은 그럴 수 없지... 십중팔구 이러고 말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렇다면 '역사 교육'의 존재 의미는 뭔가, 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지를 가르치는 수준에서 머무른 채 지금을 사는 아이들의 바로 지금 이 순간과 엮는데 실패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무지(無知) 가 반복되는 역사의 대한 이유라고 한다면, 지금 그 '쇼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역사에 대한 무지 또는 무관심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장난이 아니다. 지금 버젓이 눈앞에서 그렇게 훈육되어지고 있는데도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동조 내지 방관 중이다. 여기서 무지(無知)란 사건의 존재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작동원리'같은 실체적 의미를 모른다는 의미다.

과거는 결코 과거일 뿐? 그렇다면 현재는 현재일뿐인가? 미래도 지금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지금 한국을 지배하는 자들의 과거가 지배를 당하는 자들의 현재와 무관한가?  나치에 동조했던 수많은 독일 사람들의 과거와 지금 독일을 사는 청소년들의 현재와 무관한가? 그건 천만에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크고 작은 '쇼아'는 늘 반복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나의 현재가 부모의 과거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사건을 날조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는 이들이 설치는 이유 그 자체가 우리들의 현재와 그들의 과거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고, 그 위에 다른 조작된 과거를 새롭게 덮어 써야 앞으로 중고딩이 되어 역사를 배우게 되는 아이들이 그 지워진 과거에 대한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니까...

나는 인간이 '선한' 존재이거나 '악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저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strength 그 '집결된 힘'에 쉽게 복종하고 저항을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권위에 약하고, 권력에 약하고, 힘에 약하고, 돈에 약하고... 그리고 쉽게 과거를 잊는다.

그 '집결된 힘' 뒤에 숨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힘인냥 자신들은 '강한 존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쩌면 이들이 가장 '약한 존재' 일 수 있다. 난 그래서 '지도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야 말로 '집결된 힘'을 가장 잘 이용하는 이들인 경우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집단 바깥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도자라고? 사람들은 왜 지도자에 열광하는 걸까? 그 사람이 뭘 해준다고... 그들은 그저 결집된 힘을 이용하는 것 뿐이다. 돈 펑펑 쓰는 사람들 돈 빼면 아무것도 못하고, 폭력배들 꼭 패거리로 몰려 다니는거 보라.

드라마 마지막 장면, 벤 로스는 강당에 모인 웨이브 멤버 아이들을 모아 놓고 웨이브가 학교 내에서만의 운동이 아닌 전국적 차원에서의 거대한 운동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전국 지도자의 연설을 들어 보자고 한다. 그 지도자는 TV 화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들의 웅성거림 속에 벤 로스는 뒤의 대형 스크린으로 연설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결집된 힘'을 역사상 가장 잘 활용한 지도자의 한 예로서.


<키리냐가> 에서 키리냐가를 유토피아로 이끌 지도자로 등장하는 주술사 코리바를 괴롭히는 것은 '그의 철학과 행동이 부족의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미모와 지성, 문명과 전통, 이성과 감성... 일부를 위하면 일부를 버려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지도자'와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는 걸까.

코리바가 무엇인가 한가지를 행할 때, 그것을 따를 수 없는 이들은 하나둘 키리냐가를 떠나기 시작한다. 지도자 입장에서 보면 그 고민에 관한 기록이기도 한 작품이 또한 <키리냐가> 이다. 지도자가 그리는 세상이 내가 꿈꾸는 세상과 거리가 멀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어도 좋다.

지도자 Leader. 우리는 정말로 지도자가 필요한가? 이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난 개인적으로는 '지도자는 일종의 필요惡 일뿐' 라는 생각을 하는 편으로, '지도자를 따르자'라는 생각에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 어떤 천사가 지도자가 된다한들 세상은 조용할수가 없다. 세상의 반이 악마라면. 또는 그 반대로 그 어떤 악마가 지도자가 된다한들 세상은 조용할 수가 없다. 세상의 반이 천사라면.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어떤 하나의 대상 또는 한 사람에게 strength 힘을 집결시키고 그 힘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하는 체계" 가 과연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시스템인지 한번쯤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지도자는 우리를 이끌어야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제비뽑기해서 대표로 뽑히고는 그저 우리를 대리하는 존재인가? 대리자라면 힘이 집결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더불어 필요할지도 모른다. 힘을 모아야 광선총을 쏜다고?  그러나 집결된 힘 그 자체는 선한자의 손에 들어가건 악한자의 손에 들어가건 일단 위험한 거다. 아니, 약한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힘을 집결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일수도 있다.


2008년 9월 20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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