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더 걸> 에 관해 쓰기 전 영화 몇편 정리

그리고 <더 걸> 이전에 살펴 볼 영화가 또 한편 있다. 런던에서 경이적인 범인 검거 실적을 기록하던 한 엘리트 경찰 니콜라스는 동료들과 간부들의 견제로 인해서 범죄 발생률 제로라는 한 평화로운 시골 마을로 좌천되고, 그곳에서 마을 안전 관리 및 소일거리 등으로 무료한 날을 보내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사람들이 죽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연한 사고라고만 한다. 니콜라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고 연쇄 살인의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마을의 실체'에 대해 파악을 하게 된다.

마을 유지들과 원로들은 범죄없는 그리고 불순분자 없는 깨끗한 마을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마을사람들을 통제하고 동원하여 살인을 모두 사고로 위장하고 외부인들의 왕래를 막았던 거다. 그러니까 '범죄율 제로' 라는 것은 끔찍한 연쇄 살인을 단순 사고로 둔갑시켜 버리는 식으로, 그 마을 사람들이 쫓던 조작된 신기루였던거다.

무시무시한 공포물로 만들 수도 있을 이 심각한 이야기를 시종일관 코미디와 유머로 끌어가는 영화가 있다. 영국식 코미디와 어설픈 헐리우드식 액션을 재미있게 버무린 코미디 액션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평화롭게만 보이던 작은 시골 마을을 지배하던 파시즘과 집단 이기주의 덩어리를 헤집는 방식은 메스처럼 날카롭다.

결말에 이르면 섬뜩한 느낌까지 든다. 몸을 오싹거리게 된다. 그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파시즘을 껴안고 살고 있던 평화로운 그 시골 마을 사람들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작년 개봉되었던 위킹 타이틀표 영국 영화 <Hot Fuzz 뜨거운 녀석들 2007> 의 내용이다. 좀비 영화의 바이블 조지 로메로의 열광적인 팬이기도 한 영국 감독 에드가 라이트가 <Shaun of the Dead 새벽의 황당한 저주 2004> 이후 만든 작품이기도 한데, 이 두 영화는 콤비를 이루는 두 주인공이 계속 출연하고 있어 일종의 연작처럼 보아도 좋다.


이 영화의 배경을 독일로 옮겨 보자. 영국의 시골 마을 샌드포드를 역시 평화로와 보이기만 하는 한 마을 필징으로, 열혈 경찰 니콜라스를 똑똑하며 호기심 많고 활동적인 여대생 소냐로, 그리고 그 샌드포드의 그 보수적 원로들과 유지들을 필징의 존경받는 교수님과 신부님들같은 어르신네들로 바꾼 다음, 주인공 소냐로 하여금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마을에 대해 조사를 하게 하는 거다. 그리고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역시 유머로 설정한다.

그러면 영화 <더 걸 Das Schreckliche Mädchen 1990> 또는 <The Nasty Girl> 의 주요 설정이 만들어진다. 차이가 있다면 <뜨거운 녀석들> 에서는 외부인이 들어와 그 실체를 파악하고 상황을 정리한다는 것이지만, <더 걸> 에서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후 대학까지 진학하는 그 마을 토박이 여성이 마을을 파헤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더 걸> 은 <뜨거운 녀석들> 보다 17년 먼저 나온 영화다. 정확히 말하면 이 <더 걸> 의 무대를 영국으로 옮겨 그들의 유머를 섞어 만든 것이 <뜨거운 녀석> 들이라 할 수도 있다. 어쨌건 <더 걸> 과 <뜨거운 녀석들> 은 한참을 웃기다가 막판에 갑작스럽게 '네가 사는 마을과 사람들이 과연 네가 그렇다고 알고 있는 그 사람들일까' 질문을 던지고는 '꿈에서 깨어 나라'는 무서운 경고를 해댄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더 걸> 원제의 의미는 '불쾌하고, 더럽고, 역겹고, 구역질나는 소녀' 라는 의미의 <the Nasty Girl>. 문제는 그 소녀에 대해 'Nasty' 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왜 그렇게 느끼냐는 거다. '나치에 저항했던 마을'의 과거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던 마을 사람들은 왜 갑자기 이 소녀를 'Nasty Girl' 이라 욕하냐는 거다. 인간이 얼마나 모순되며 얼마나 자기 배신을 밥먹듯이 해대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증거들은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소냐는 필징 시의 아주 보수적인 카톨릭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찍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 마을 사람들의 인정 속에 아주 평범하게 살던 그런 여성이다. 다만 호기심이 많고 똑똑하고 글쓰기를 잘해서 전국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대통령상까지 받아 마을 어른들로부터 사랑받고 늘 칭찬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녀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마을에 대해 궁굼해하기 시작한 것은 두번째 에세이 콘테스트에 준비하면서부터. 주제는 '2차 세계 대전 시절 내 고향'. 2차 세계 대전의 중심에 있었던 독일로서 우리 마을은 그때 어땠을까, 종전 후 한참 지난 세대가 궁금해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어야 한다.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으로 우리나라는 그게 너무 심각해 보인다.

자료조사를 위해 도서관을 뒤져 옛날 신문 기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들을 찾아내고 열람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기밀자료라서 안된다, 대출이 되어서 언제 반납될지 모르겠다, 어디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열람불가다, 는 식으로 계속 거부당한다. 마을 사람들과의 인터뷰 또한 계속 겉돈다.

자료 조사가 어려워지고 제출 기한도 넘기고, 소냐는 에세이 공모전은 포기하지만 역사적 호기심이 발동하고 그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어떤 진실이 숨어 있길래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비협조적인지 알아내고 싶어한다. 결국 그녀는 마을 전체를 고소하여 자료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를 한 뒤 그 조사 결과물을 아예 책으로 낼 생각으로 대학까지 입학하여 혼자로는 감당 안될 것 같은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의 따돌림과 협박, 그리고 신나치주의 집단의 폭탄 테러까지 당하는 등, 소냐의 가족은 여러 차례 살해 테러의 위협까지 받지만 가족들은 계속 소냐를 지지한다. 그러면서 소냐가 찾아낸 것들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것들이다. 필징이라는 나치에 저항한 것으로만 알고 있던 도시가 실은 유태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자신이 존경하던 교수님과 신부님들이 그 앞잡이였다는 증거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냐는 이 이야기들을 결국 책으로 출판되고 독일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에 이른다.

*

마지막 장면. 몇십년 만에 그 정체가 탄로나게 된 도시의 어르신네 지도자들을 뒤로 한 채, 소냐를 픽박하던 마을 사람들은 소냐와 그녀의 책이 유명해지고 또 그 마을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갑자기 소냐를 칭송하기 시작한다. 마을에 그녀의 모습을 딴 동상을 설치하려 들기까지 한다. 그 축하연에서 마을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동상을 본 소냐. 그녀는 다시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공포를 느끼고는 그곳을 도망친다.

자신의 어린 딸을 안고 마을 언덕으로 도망가듯이 뛰어 올라간다. 그리고 뒤를 한번 돌아다 본다. "나무야 도와다오. 그들이 나를 잡지 못하게 해다오." 다시 오르기 시작할 때 카메라는 왼쪽으로 급하게 이동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는 소냐의 모습을 찾아 낸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유머와 웃음이 싹 사라져 버린 공간을 슬픔, 충격, 모순, 공포, 경악이 채운다. 이 급작스러운 변화에 너무 당황스럽다.


우리 마을은 나치즘 (또는 파시즘) 에 저항했었다며 마을의 전력을 왜곡하고 그 조작된 가치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는 그 현상 자체가 결국은 파시즘, 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더 걸> 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거다. 파시즘을 파시즘으로 덮는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렇기도 하다.

소냐가 그녀의 조사 활동를 방해하는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뒤에 걸리는 배경으로 현실 공간이 아닌 마을의 건물과 도서관이 담겨진 흑백 사진을 걸어 놓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대사를 주고 받게 하는 것,

가끔씩 등장하는 공간을 카메라가 왜곡되게 잡는다거나 만화의 한컷처럼 다양한 방향에서 잡아내는 장면, 스스로 리포터가 되어 TV 방송하듯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관객들에게 직접 설명하는 듯한 나레이션 장면 등,

그녀가 찾는 장소마다 그 모든 상황을 소냐가 직접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활동과 생각에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하는 것 같은 영상 스타일 면에서도 또한 매우 이채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비록 거의 20년 전에 나온 영화일지라도. 참고로 이 이야기가 Passau 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Anja Rosmus 라는 소녀에 대한 실화임을 잊지 말자.


2008년 9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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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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