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자유롭게 다니던 영화관, 공연장, 전시회 근처는 이제 당분간 드나들기 어렵겠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지만, 다행히도 DVD와 블루레이, 그리고 가끔씩 이용하는 IPTV 영화를 2~3일에 한번씩 정도는 즐길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대충 자리잡힌 것 같다. 음악도 장르가 조금 편협해지기는 했지만, 새로 산 앰프를 이용하여 가끔 듣는 편이다.

그러나 다만 안타까운 점은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밤에 자다가 서너 시간마다 깨야 하니 늘 잠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화는 두세 시간 동안 대충 눈을 부릅뜨고 보면 버틸 수 있지만, 책을 읽으려고 들면 아무래도 잠이 쏟아진다. 낮시간에 책을 읽을 짬을 내기도 쉽지 않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최근에 산 세 권의 책이 글쓰기 또는 독서에 대한 책이었는데, 알고 보니 조지 오웰의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 아니라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짧은 에세이가 포함된 그의 에세이 모음집이었다. 집에 있는 다른 작품들과 많이 중복되기도 하는 모음집이지만, 매우 흥미로와 보인다. 어슐러 르귄의 책은 내가 생각한 것과 내용이 좀 달라서 금방 읽을 것 같지는 않고, 최성각의 책은, 더 읽고 싶게 만드는 책 소개들을 꼼꼼하게 담고 있어서 이것 저것 책을 더 많이 사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사기만 하고 읽지 못하는 책들이 자꾸만 쌓여 가니 잠을 줄여서 책을 읽어야 하는데 눈꺼풀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얼마 전 공부하기 싫어하는 한 꼬마가 (참고로 이 꼬마는 학원 가기 무지 싫어하는 중학생임.), 책을 많이 읽으라는 나의 충고에 "내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데~  한 달에 한 권씩이나 읽거든!" 이라고 항변해서 막 웃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남에게 충고할 입장이 못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못 하는 상황이 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인지라... 요즘에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데 졸음과 피곤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연약한 의지력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 와중에 최근 <화씨 451>의 저자로 유명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틈틈이 읽었다.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새로 출간된 SF 문학의 걸작인 <화성 연대기>는 20 여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작품으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인 이야기를 이루는 동시에, 몇몇 에피소드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짤막한 풍경을 묘사하는 단편에서부터 마치 <환상특급> 한 편을 보는 듯한 기묘한 상상력이 넘치는 단편들, 또는 날카로운 문명 비판을 담은 심오한 이야기들이 때로는 희극적인 경쾌함을, 때로는 비극적인 애잔함을 넘나드며 펼쳐진다. 각 에피소드가 기본적으로는 우주 여행과 화성 정착(혹은 정복)을 다루고 있지만, 단지 화성을 배경으로 했을 뿐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풍자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거나 (특히 신대륙 정복이나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 문명 간의 충돌을 다루거나, 또는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면서 결국 작가는 지구인과 지구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에피소드들은 독특한 아이디어와 견고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어서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다른 행성을 배경으로 하여 인류 문명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소설 <키리냐가>를 떠올리게 되기도 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적막에 휩싸인 도시들"은 너무 웃겨서, "하늘 한가운데 난 길로"는 인종차별이라는 소재를 우주 여행과 결합하여 흥미롭게 변주했기 때문에, "어셔 2"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스토리이면서도 <화씨 451>과 맞물려 고전문학 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느껴져서, 특히나 더 인상적이었다.  

추천사나 옮긴이의 말에서도 강조되듯이 레이 브래드버리는 SF 작가이면서도 특유의 시적인 문체로 "우주의 음유시인"이라는 호칭에 잘 어울린다. 아래와 같은 문장을 담은 그의 아름다운 작품이 이렇게 뒤늦게라도 출간되어서 다행이다.



"오늘 밤 공기에서는 시간의 냄새가 났다. (중략)
시간은 어떤 냄새일까?
먼지와 시계와 인간이 뒤섞인 냄새이다. (중략)
오늘 밤에는 왠지 시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2010년 10월 2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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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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