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PBOY's JAZZ BAKERY

체인질링 (2008)

영화2017.04.06 23:39


용산참사 사건에 대해서 검찰은 '경찰은 혐의없음'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연한 결과다. 우리나라 검찰은 우리가 늘 희망하는 그런 조직이 아니었으니까. 경찰도 마찬가지였고 국회도 마찬가지였고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이며 국가의 한계이고 형식적으로는 그것을 바꿀 기회를 주어도 기꺼이 바꾸지 못하는 사람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블로그에서 늘 하는 이야기지만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그 시스템의 운전대를 누가 잡느냐 하는거다. 오로지 입력되는 프로그래밍에 의해서만 판단하는 로봇과 기계가 잡지 않는 한 시스템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평등하지 않고 파워의 균형 위에 서있지 않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시스템은 '이기심과 불평등'에 의해 작동한다. 사실 '평등'하다면 시스템은 오히려 작동하지 않는다. 고전경제학의 대전제처럼 합리적인 경제활동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하지만 그 부작용은 '불평등' 때문에 생겨 나듯이 공권력 시스템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제도의 특성상 오히려 더 심한 조직이기주의와 개인의 영달과 출세지상주의가 판치게 된다. 공권력 시스템의 일원이 되는 자격조건이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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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나는 이런 부분을 생각한다. '이기심'에 의해 인간은 활동하기는 하지만 '불평등'을 단 한순간도 해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니 도리어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항상 그 '이기심'의 성과는 어느 한 쪽으로 쏠려왔다. 그리고 공권력이 자연스럽게 그 관료제 조직의 생존과 번영 자체를 위해서 그 쏠림 현상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시스템이 되어 버린다. 고로 양쪽 다 더 부패한다. 그리고 언론이 이 사실을 적절히 감춰주고 포장해 준다.

정의와 질서를 지키고 법과 절차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여 열심히 공부해서 경찰이 되고 검사가 되어 그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지만 한편으로는 '관료제 조직'의 한 일원이라는 딱지도 달게 된다.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권 수호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정의와 질서와 법과 절차를 지키는 것이 현실에서는 '관료제 조직'의 작동방식과 대단히 크게 충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도 인간이라서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파워를 가진 거대 이기심들의 부패와 협잡의 파트너가 기꺼이 되니까. 우리는 이런 영화를 숱하게 보아왔다. 단골 소재니까.

여기서 문제가 시작한다. 그 조직의 논리를 누가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또는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합리적 절차에 기반해야만 하는 모든 공권력이 실제로는 절차를 무시하고 몇몇 개인을 위해 봉사하도록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는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행동할거냐 하는 거다. 그것이 대인과 소인의 차이였고, 숱한 개인의 투쟁 경험들이 쌓인 인간의 역사였다. 이러한 논쟁에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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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사건에 대한 경찰과 검찰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니 1920~30년대 미국 경찰의 단면을 그리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008년 영화 <Changeling> 에 등장하는 경찰보다도 못한 수준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치듯 든다.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극장을 나서면서 80세를 바라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뭘까, 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이전 작품에 비하면 그다지 수작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대단히 친절하게 직설적으로 상황 만을 담담히 묘사하는 거장의 미학에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같기도 하고... 스필버그가 자신의 장기 버리고, 즉 차포 떼고 핸드헬드와 스테디캠 들고 열라 뛰어다니며 <쉰들러 리스트> 찍는 것 같은...

굳이 애써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자, 라는 의도였을까... 140분을 끌면서 분노에 기반한 관객의 몰입을 염두에 두었을까... 그러나 직설적인 철학적 관점에서의 영화적 힘은 대단했다. 그래서 굳이 뽑아낸 몇가지 키워드. 경찰의 무능, 공권력의 부패, 유괴라는 범죄, 가족 해체, 싸이코 패스, 연쇄살인, 정신병원, 불감증, 청문회, 재판, 사형, 삶과 희망이 뒤섞여 있는 듯 하다. (가족, 삶과 희망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근 읽은 코맥 맥카시의 소설 <로드>의 인상도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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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미국. 알 카포네의 마피아가 시카고를 넘어 미국 전역을 주름잡고, 보통 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금주법의 틈을 비집고 주류 밀거래와 무허가로 술집을 개업하고 그 잇권 다툼을 위한 범죄조직 간의 처절한 도시 속 전쟁을 벌이는 동안, 거대 범죄집단이 제공하는 돈을 덥석 문 경찰과 정치인들이 그들을 비호하고, 하여간 뭐 그런 시대였다. 참고로 당시의 경찰상에 대한 영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 이 일단 떠오른다.

알 카포네가 잡히기 바로 전이기도 한 1928년. 예전에는 천사의 도시였던 LA 도 범죄와 경찰이 야합하고 인권을 밟고 모든 공권력 행사의 절차를 무시하며 점점 경찰의 무방비 도시로 변해가는 상황. 경찰의 신뢰와 명예가 점점 추락했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화에서도 경찰의 부패와 무능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던 브리그랩 목사 (존 말코비치) 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더 후반이기는 하지만 50년대 LA 경찰을 이야기하는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도 떠오른다.

천사의 도시였던 LA 에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엄마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와 아들 월터 콜린스가 살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가족은 항상 '사회적 약자'에 속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그 관계는 더 단단한 '싱글맘과 어린 아들'이라는 관계로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며 대개 우리들 누구나 이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어느날 월터 콜린스가 실종되면서 이 가족은 원인모를 강제 해체를 당하게 된다. 엄마로서는 자신의 전부이자 삶을 지탱시켜주는 아들이 사라진 것. 크리스틴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경찰이라면 (유괴라는 범죄를 미연에 막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찾아서 엄마 품으로 돌려 보내야 하고 우리는 그러기를 기대한다. 다시금 모성본능이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며 보게 되는 유괴를 다루는 많은 영화에서처럼.

몇개월 후 경찰은 크리스틴에게 월터를 찾아서 돌려 보내기는 한다. 그런데 엄마 크리스틴은 그 아이가 아들 월터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경찰이라면 엄마가 아니라고 하니까 아이를 찾는 수사를 빨리 재개하는 것이 상식이다. 아이가 유괴되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그러나 경찰은 도리어 엄마를 정신이상으로 몰아 버린다. 멀쩡한 아들도 못알아 본다면서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시켜 버린다. 어이가 없다.

이 경찰이라는 조직은 상식에 근거하지 않은 황당한 판단을 내리면서도 (아마도 관행처럼 그래와서 '도덕 불감증'에 걸린 듯)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자신들 행동의 당위성을 찾는 것에만 골몰한다. 사소하지만 골치아픈 문제는 적당히 덮어 버리다가도, 그것이 실추된 명예와 신뢰 회복에 유리하다 판단하면 과감히 "우리 참 잘했어요" 조작과 쇼도 서슴치 않는다. 아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경찰은 쇼를 하고 생떼를 부리고 생사람을 잡으며 시간만 허비한다.

정치인들과 경찰 간부들은 자신들의 임기동안 아무일 없이 명예로움만 쌓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언론을 교란하고 숨기고 싶은 일은 뒤에서 은밀히 처리한다. 일개 시민의 공권력에 대한 도움 요청은 관심거리가 아니고 도리어 귀찮아 한다. 아들을 찾아 달라고 하는 크리스틴의 요청은 묵살되고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는다. 관객은 분노할 수 밖에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관객들의 이 분노의 에너지를 원했을까...


나를 가장 섬뜩하게 만들고 기억에 남게 만든 인물들은 크리스틴이 수감된 정신병원의 간호사들이다. 영화는 크리스틴이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만나게 되는 캐롤 덱스터라는 여인의 입을 빌어 '어떤 사람' 들이 이곳에 들어 오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요약하면 경찰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이나 반대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는 사람들.

정부는 이미 인터넷을 괴담의 근원지라 매도하며 사이버모욕죄를 통해 정신병자를 찾아내어 그들을 수감할 사이버 정신병원과 같은 곳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바 있다. 그들의 주장은 아주 극렬하며 인터넷은 그들의 뜻대로 우리나라의 인터넷의 사이버 정신병원화 작업을 충실히 이행 중이다.

극렬하게 저항하거나 반항하는 이들에게 정신병원의 간호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며 전기충격을 가한다. 그 표정이 가장 섬뜩하다. 저들은 뭐하는 이들이며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차 있을까? 경찰을 두려워하는 이들일까? 그러나 거꾸로 오히려 세상을 가장 두려워하는 집단이야말로 바로 경찰 집단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치챌 수 있다.

경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직업 윤리와 그 병원 내에서의 조직적 체계 역시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겪고 있는 걸까... 그러나 이곳은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병원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곳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또한 그 윤리에 봉사해야 하는 이들이고. 그러나 이곳도 역시 조직이며, 누가 운전대를 잡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개인이라도 조직 내에서는 그 철학과 가치관이 통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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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보호에 있어 '절차' 라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즉 인권 보호는 착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나 법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에 대비해 그 '절차'를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조직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 이라는 말이다. 물론 가장 철저해야 하는 집단은 정부와 국회고. 우리나라는 이것이 무너졌으니, 그 하위 조직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가정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집단은 이 영화에 따르면 일개 개인이 아니라 경찰조직이고 검찰조직이고, 정부이며, 국회이고, 변호사들이고, 의사들이라는 거다. 그들이 스스로 '절차 수호'에 대한 철저한 원칙을 지켜 나가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이고 노력한 이후에야 법과 질서 수호가 가능하며, 인권 보호가 가능하다.

여기서 공권력 조직의 대전제를 끌어 낼 수 있다. 간단하다. 자꾸 편법쓰지 말고 "절차와 원칙을 지켜라" 새로운 것이 아니다. 경찰이 상식에 근거한 원칙을 지키기만 해도 크리스틴과 월터같은 싱글맘과 아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며, 용산참사같은 사건도 없었을 것이며, 이명박의 폭정도 없었을 거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보수주의의 가치라고? 천만에.

공권력 시스템일수록 '절차와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며, 부패와 무능이라는 것은 바로 이 '절차와 원칙'을 어길 수 있는 편법 동원과 그것을 포장할 수 있는 언론 플레이가 동원되는 것, 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직설화법을 통해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거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재판과 청문회 장면이 계속 등장하는데, 간단하다. 경찰의 직업윤리와 절차를 무시한 무능과 부패 행위는 이 사법 제도의 엄격한 '절차'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공권력 제도일수록 '절차와 원칙, 지킬 것은 지켜라' 감시하는 당사자 스스로가 지키지 않으면 감시당하는 쪽은 대단히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으며 그 시스템은 붕괴한다, 라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2009년 2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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