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PBOY's JAZZ BAKERY


참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용서받지 못한 자> 전까지

이전 글에서 이 영화 이전에 그가 출연한 또는 연출한 작품들을 배우-감독-작가-거장의 단계로 언급한 것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처음부터 대단한 걸작을 발표한 천재감독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와 돈 시겔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연출을 시작한 1971년 이후로는 거의 매년 한편씩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라는 것에 대해 탐구해 왔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그는 그 많은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수많은 시행 착오를 겪고 경험을 하고 평가를 받으면서 감독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거장으로 단련을 해온 것이다. 한 작품 한 작품 영화 미학을 터득해 나가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과 이미지를 결합하여 꾸준히 자신의 스타일을 다져 나갔다. 타고 난 재능과 요령으로 지름길을 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한계단 한계단을 밟으며 명예의 전당으로 오르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한계단 한계단 오르던 그는 나이 62세 영화인생 40년을 앞두고 <Unforgiven 용서받지 못한 자 1992> 라는 영화를 만든다. 16번째 장편 연출작이고 그해 전세계 비평가들로부터 최고의 영화로 극찬의 극찬을 받았다. 1993년 65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진정한 거장의 반열의 오른다.



그러나 세상은 갑자기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랜기간 영화에 대해 사색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세상은 그의 전진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80세를 바라보는 노령임에도 이 고독한 건맨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여기저기 자신의 명상과 철학의 흔적을 남기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를 천천히 전진하며 방황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시대 영화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멘토로 삼고 본받기에 첫 손가락을 꼽아야 할 인물이며, 그의 최신작인 <그랜토리노>를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인정할 수 밖에 없다.

ooo

1992년 당시 이미 62세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관심은 무엇이었으며 왜 <용서받지 못한 자> 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 마지막에 세르지오 레오네와 돈 시겔에게 영화를 바친다는 짤막한 문구는 스크린에 왜 넣었을까... 그는 레오네와 시겔 두 스승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가이자 철학자로 단련되고 성숙한 거장으로 성장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시작은 '천재'가 아니다.

'야만과 문명', '악당과 영웅', '무법과 질서' 라는 미국식 이분법적 서부극의 세계관에 대해 레오네 영화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고민해 왔다. 영화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기도 하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가 연출한 다수의 서부극과 형사물에서 누가 진짜 악당이며 누가 진짜 영웅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선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악당과 영웅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문명은 과연 진보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정의로와 보이지만 공포의 대상이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지만 거친 폭력을 행사하며,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공권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그리고 그의 이런 고민은 <체인질링> 과 <그랜토리노> 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흔히 그를 보수주의자로 알지만 실은 눈에 보이는 법의 집행과 질서 유지가 중요하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는 "그렇지 않다" 라고 일축하고 오히려 반문한다. "당신은 법집행과 질서유지 작동방식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가..." 라고 말이다.

질서 vs. 정의

이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그가 고민해 왔던 주제와 철학과 사유와 미학을 모두 집대성한 작품이기도 한 <용서받지 못한 자> 를 통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질서는 무엇이고 정의는 무엇인가?



주무대는 와이오밍의 빅 위스키라는 마을의 한 술집. 와이오밍은 웨스턴 무비의 주무대이기도 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바로 그 곳에 술집을 차리고는 거기서부터 서부극 또는 미국의 이분법적 질서의 세계를 해체하고 조롱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술집에 고용된 한 매춘부가 놀러 온 마을 카우보이들로부터 얼굴에 난도질을 당하는 잔인한 폭력을 당한다. 그리고 그 마을 보안관 리틀 빌 (진 해크만) 이 도착하고 즉결심판을 내린다. 술집 주인에게는 수익을 안겨 줄 재산에 흠을 낸 죄로 말 다섯마리, 그 여인에게는 상해죄로 말 두마리.

문제는 그 마을에서의 보안관의 존재가치다. 그는 매춘부 여성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보호와 질서유지는 그 의미가 다르다. 법 집행과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보안관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보안관 리틀 빌에게 주어진 권력은 절대적이고 질서 유지를 위한 보안관의 폭력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아무도 그에게 맞서지 못한다. 질서의 실체다.

'정의와 도덕'이 아니라 '질서와 안전'이 리틀 빌의 관심이다. 폭력의 권한을 가진 입장에서 보면 질서 유지의 방법은 간단하다. 질서 유지를 위한 폭력의 정당성만 찾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범죄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도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질서를 위한 폭력은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러니 현정부는 그토록 경찰 폭력의 당위성을 외치고 싶겠지...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처럼 살인하지 말라는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살인자를 국가가 살인해도 좋다" 라며 법의 질서 유지권을 부여하는 아이러니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법, 질서, 안전 이런 것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가치 아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보수적 가치의 실체에 대한 해부 작업을 보수주의자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 그렇다면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최하층 사회적 약자인 매춘부에게 질서 유지의 대가가 말 두 필이라면 그녀들을 위한 정의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영웅 vs. 악당


진짜 문제는 매춘부들을 위한 '정의'의 실현이다. 어떻게 그 억울함을 풀어 줄거냐,라는 것. 우리가 정말 고민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법은 왜 존재하는가, 도대체 질서는 왜 유지되어야 하는가. 기껏 말 두마리 보상이 그 끔찍한 공포의 대가이며 질서 유지의 결과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기서 자본주의의 속성과 법치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매춘부들은 자체적으로 그 범죄자를 응징하기로 결정하고,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복수를 하고자 각출하여 돈을 모으고는 그 악당 카우보이의 목에 현상금을 건다. 그녀들의 휴머니즘을 지키는 것이 지금 내부에서 해결이 안되고 돈으로 무법자를 매수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려는 그녀들의 선택은 리틀 빌이라는 보안관의 질서 유지 체계에서는 불법이며 무법자를 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밟고 선 현대의 자본주의를 많이 닮아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외부로부터 약자들에게는 의롭지만 보안관에게는 무법자인 영웅(?) 또는 악당(?)이 들어 올 여지가 없다.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폭력과 질서유지의 가치를 지키며 법을 집행하는 보안관 리틀 빌이 있으니까. 무법의 형사 더티 해리 캘러한이나 황야의 스트레인저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왕년의 유명한 공포의 무법자 총잡이였지만 이제는 돼지를 키우며 근근히 살아가는 윌리엄 빌 머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게도 이 현상금 소식은 전해진다. 돈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는 젊은 총잡이 스코필드 키드와 네드 로건 (모건 프리만) 과 함께 현상금을 찾아 빅 위스키라는 마을에 입성하게 되고...

그러나 리틀 빌에게 이들은 무법자일 뿐이다. 결국 술집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수모를 당한 채 쫓겨나는 윌리엄 빌 머니. 리틀 빌은 자신의 질서를 파괴하고자 방문한 낮선 침입자를 잔인한 폭력으로 응징한다. 고전적 웨스턴이라면 영웅이 악당을 무찔러야 하는데, 이 술집에서는 때리는 자와 맞는 자 중에서 누가 영웅이고 누가 악당인지, 누가 질서를 파괴하고 누가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지 그 구분이 모호하다.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이 세 명의 현상금 사냥꾼은 매춘부들의 간호와 협조 덕에 다시 빅 위스키로 들어 가고 결국은 그 두 명의 카우보이 악당들을 해치우고 만다. 여전히 이들은 약자들의 유일한 의지이자 영웅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돈을 노린 이들의 살인은 과연 정의인가? 리틀 빌에게는 용서못할 범법 행위이며, 매춘부들에게는 자신들의 복수를 해준 영웅적 행동이고, 현상금 사냥꾼 당사자들은 원하던 돈을 손에 넣었다. 자본주의와 남성적 사고가 지배하는 마을의 질서라는 것은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정의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중간중간 리틀 빌이 자신이 살 집을 짓는 장면이 등장한다. 제대로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마을을 지배하지만 집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거침없이 폭력을 사용한다. 문명을 개척을 한다는 명목으로 잔인한 야만과 폭력을 일삼았던 미국의 서부 개척신화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조롱하고 있으며 이전 웨스턴 무비의 가치를 하나하나 부정하고 있는 중이다.

야만 vs. 문명

악당 카우보이 한 명은 네드 로건의 총에 맞아서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고 다른 한 명은 시력이 나쁜 스코필드 키드에 의해 완전 비무장 상태에서 코 앞에서 총을 난사당한다. 이 둘은 자신의 살인 행위에 대해 괴로와 한다. 어쨌건 현상금도 받았으니 이제 각자의 집으로 가면 되지만,

윌리엄 빌 머니는 돈을 가지고 온 매춘부로부터 네드 로건이 보안관 리틀 빌에게 잡혀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네드 로건은 흑인이며 인디언 아내가 있다. 리틀 빌의 마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인종이며 야만인들일 뿐이다. 따라서 리틀 빌은 야만인들의 문명 세계로의 침범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다. 철저히 응징한다. 여전히 보안관은 마을의 영웅인지 악당인지 모호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날 밤. 윌리엄 빌 머니가 다시 그 술집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보안관 리틀 빌과 그의 끄나풀들을 모두 총으로 쏴 죽인다. 확인사살까지 확실하게. 이 심야 공포의 총격은 네드 로건에 대한 복수일까?  서부개척 신화에 숨어 문명이라는 명목으로 인디언 말살과 야만적 행위를 일삼았던 그 위대하다는 미국의 건국 및 개척신화에 대한 처절한 부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급하게 그 마을을 떠나려 말에 오르는 윌리엄 빌 머니 옆으로 비를 맞으며 펄럭이는 성조기의 장면이 이어진다. 서부 개척의 실체는 악이요 야만이며 추악함이지 결코 영웅적 행위로 포장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16번째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ooo

이 영화는 두고두고 몇번씩 볼 만한 걸작이다. 자기 자신도 헐리우드 주류 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고 미국인이며 보수주의자로 통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질서와 안전보다는 정의와 도덕을, 자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를 주장하며, 이 세상은 미국이 떠드는 것처럼 '영웅과 악당'의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주의는 경찰폭력의 정당성을 찾는 것이 아니며, 정의가 아닌 질서유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정글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휴머니즘을 배척하는 미국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을 오히려 야만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장 최근 작품인 <그랜토리노>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르지오 레오네와 돈 시겔로부터 배운 그대로이기도 하다.

2009년 3월 24일 작성


저작자 표시
신고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