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 크로스로드에서 벌이는 파우스트와 악마와의 경주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 현금 20억과 총을 보여주며 내기를 제안한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20억은 내것이 되나, 뒷면이 나오면 그 총에 죽임을 당한다. 아주 간단한 내기다. 그 제안에 응하냐 마느냐도 오로지 나의 선택이다. 응하지 않으면 그 제안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지만, 일단 응하면 20억을 차지하던지, 죽던지 둘 중 하나다. 나는 이 내기를 받아 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가지 전제는 나는 하루하루를 간신히 먹고 사는 가난뱅이라는 것...

간단한 내기라고 했지만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내기는 실은 메피스토텔레스가 제안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20억을 받는 대신, 메피스토는 이 세상에서 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20억을 받고 악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로써 악마와의 레이스가 시작되는 거다. 뒷면이 나와도 골치가 아프다. 그가 나의 영혼을 가져 갔기 때문에 저 세상에서는 내가 메피스토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죽어서는 악마를 섬기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메피스토텔레스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손해를 안 보는 계약이다.

자, 나는 이 내기를 받아 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이 고민 위에서 몇 주 전에 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를 다시 생각했다.


르웰린 모스가 20억이 든 가방을 움켜쥐는 순간 그는 악마와의 계약에 싸인을 한 것이다. 그러나 모스는 그것이 악마의 제안임을 알아채고,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가방을 움켜쥔 채 그 뜨거운 텍사스에서 죽음의 레이스를 벌인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추격전 부분은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러나 20억 뭉치에는 송수신 장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악마는 돈만 쫓아가면 된다. 돈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계약서에 싸인한 인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설정이 아주 흥미로왔다. 돈만 쫓아가면 그곳에 그놈이 있다니... 나중에 돈을 멕시코와의 경계 부근에 버리긴 하지만, 모스는 결국 그 주변을 배회하다 죽임을 당한다. 그를 죽인 놈이 안톤 쉬거인지 멕시코 조폭 일당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놈들도 악마의 하수인일 뿐이고 돈 있는 곳에 있으면 누구든 죽었다.

파우스트의 설정을 빌리자면, 계약의 두 당사자인 인간과 악마, 즉 르웰린 모스와 정말 기분 나쁜 헤어 스타일과 다크 서클의 안톤 쉬거 말고, 제3자가 있어야 한다. 그는 신이다. 여기서의 신이란 간단히 말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악마와 싸워야 존재라고 보도록 하자. 그러니까 보안관인 에드 톰 벨이다.

그러나 사실은 보안관 에드 톰 벨은 비겁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앞에 선 악마를 보고서도 그는 인간을 위해 싸우지 않고 도망을 간다. 그렇다면 젊었을 때는 좀 싸웠나? 영화에서는 각색 과정에서 빠졌지만, 그는 2차대전 참전용사로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참고로 르웰린 모스는 베트남전 참전 저격수였다. 소설에서 에드 톰 벨은 엘리스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훈장이 사실은 자신의 비겁의 댓가임을 고백한다.

악마적 만행의 절정인 전쟁에 참전해서 훈장까지 받은 보안관은 실상은 악마를 보면 도망가는 비겁자였을 뿐이다. 나는 이것이 노인의 무기력함과는 다른 것이라 본다. 영화 중간중간 그가 악마와의 싸움을 회피하는 장면이 간간히 등장한다. 멕시코 경계에서 벌어진 모텔에서의 총격전 후, 보안관이 그곳을 그냥 조용히 떠나는 부분.... 이 부분은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장면이다.

그런데, 원작소설도 그러하지만 영화는 보안관 에드 톰 벨의 관찰시점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묘사를 한다. 이것이 악마로부터 마을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지만 회피하는 보안관의 시각이라는 거다. 이건 참 대략난감인 상황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는 다그치거나 급박한 대화장면이 없다. 지옥에서 펼쳐지는 악마와의 죽음의 레이스답게 긴박함이 시종일관 관객을 지배할 지라도, 정작 그 대화들은 느리고 담담하고 조용하다. 에드 톰 벨의 대화들은 어쩌면 그 치열한 추격전과 급박함을 마치 "그게 뭔데..." 라고 피해가는 비겁한 변명처럼 보인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20분이다. 에드 톰 벨이 엘리스 아저씨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 칼라 진 모스와  안톤 쉬거의 대화, 그리고 에드 톰 벨의 거의 독백에 가까운 아내 로레타와의 대화 장면인데, 나는 도대체 그 대화의 의미를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다 같은 내용의 대화들이다.

영화는 각색과정에서 소설의 몇부분을 빼고 다소 유니버설하게 사고의 범위를 넓혔다. 일종의 범용성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보안관을 바라보는 시각이 애매해졌다. 사실은 원작의 내러티브에서 오히려 독기를 좀 빼 낸 느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카데미 각색상을 준 건지 어쩐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번역판 소설을 읽었는데도 여전히 의문점은 좀 남는다. 그래서 원서도 한번 볼까 생각중이다.


조엘 에단 코엔 형제는 미국영화만을 만들어 왔다. 그들이 만든 영화의 상당수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폭력에 관한 것들이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광이기도 하다. 미국 본토 내에서는 전쟁이 없다고 하지만, 실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기가 집집마다 있는 곳이 미국이다. 정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처절한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처음에는 안톤 쉬거가 미국 그 자체처럼 여겨졌다. 조금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번에는 애드 톰 벨도 미국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르웰린 모스도 미국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미국은 악마이자, 악마에 영혼을 판 인간이며, 동시에 그 둘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수수방관하는 신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사탄을 멀리하라는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인간의 찬란한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돈의 자본주의라는 악마 앞에서는 비겁하게 도망가고, 심지어는 스스로 악마로 돌변해 전세계를 피로 물들이는 전쟁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20억이 든 가방을 그냥 지나치라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내기에 응하라고 꼬드긴다. 모두가 안톤 쉬거에 쫓기는 르웰린 모스의 신세가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돈을 쫓지 않았던 르웰린 모스의 아내까지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그 악마와의 계약서 이면에 쓰여져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2008년 3월 19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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