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아름다운 시절


20년 전 서울 종로 2가에는 코아아트홀이라는 극장이 있었다. 1989년 개관하여 2004년 폐관했다. 2000년 광화문에 씨네큐브가 개관해서였을까. 하여간 1990년 후반 황금기를 보낸 예술영화를 보려면 대학로 동숭동 아니면 코아아트홀이었다. 생각해보면 코아아트홀은 늘 좌석 때문에 좌불안석이었다. 앞 좌석이 공석인 운수 좋은 날만 스크린이 온전히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8에서 응4세대로 영화 좀 본다 하는 커플이라면 코아아트홀은 데이트 장소 일순위였다.


상업성이 옅은, 개성이 강한, 국제영화제에서 상 받은 작품들. 영화사 백두대간이 쏘아 올린 예술영화의 상징 같은 작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키에슬롭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아비정전>, <해피 투게더>,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장 피에르 주네의 <델리카트슨 사람들>,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 <록키 호러 픽쳐 쇼> 같은 작품들을 여기서 보았다. 두 번 다시 응답하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이다.





네가 음악을 알아?


1997년 코아아트홀에서는 조셉 빌스마이어 감독의 1995년 작품인 <브라더 오브 슬립>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조셉 빌스마이어는 2차 대전 독일과 소련이 스탈린그라드를 두고 200일 동안 벌인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투를 독일의 시각으로 그려낸 1993년 작품 <스탈린그라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차 대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심이 있다면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Brother of Sleep>은 독어로 <Schlafes Bruder>이고 직역하면 "잠의 형제"가 된다.


1997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음악 좀 듣는다는 나에게 <브라더 오브 슬립>은 네가 음악에 대해 아는 게 뭐냐 질문을 던졌다. 부끄러웠다. 난 천재가 아니므로 방법을 알아야만 음악이 들리는 것임을 알았다. 학업은 내려두고 도서관에 처박혀 음악 서적을 읽으면서 지식에 지식을 더하여 이론과 역사로 나누어 정리하고 기록하였다. 1997년은 그렇게 보냈다. 여기 글들은 그때 기록의 개정 버전이다. 다시 열정의 1997년을 살고 있는 셈이다. 1997년의 20년 뒤 즉 지금의 나를 구원한 것은 음악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다. 전공 따위가 아닌.


오라 죽음이여 그대 잠의 형제여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잠과 죽음은 쌍둥이 형제이다. 잠의 신은 최면술을 뜻하는 hypnosis의 어원인 힙노스, 죽음의 신은 타나토스. 이들의 어머니는 밤의 여신 닉스로 그녀가 날개를 펼치면 밤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대인들에게 죽음은 잠의 연장이었을까. 참고로 잠의 신 힙노스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이 꿈의 신 모르페우스이다. 진통제 모르핀의 어원인. 하여간 "잠의 형제"란 죽음을 의미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to die, to sleep; to sleep, perchance to dream..." 셰익스피어의 <햄릿> 3막 1장의 명대사 "죽는다는 것은 곧 잠드는 것, 잠드는 것은 아마도 꿈을 꾸는 것...". 이탈리아 아트락의 전설 뉴트롤즈는 이 대사에 알비노니 아다지오 풍의 선율을 붙여 <Adagio>라는 곡을 만들고 1971년 작품 명반 중의 명반 <Concerto Grosso Per I>에 수록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으며 뉴트롤즈와 이탈리안 아트락을 알린 곡이기도 하다. 뉴트롤즈는 몇 차례 내한공연을 한 바 있다.


로버트 슈나이더의 <잠의 형제>


조셉 빌스마이어의 <Brother of Sleep>은 로버트 슈나이더라는 오스트리아 작가가 1992년 발표하여 출판사의 노력 없이 소설 자체의 힘으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고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이 내린 청각으로 우주의 소리까지 듣고 음악의 모든 것을 깨닫지만 연인과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비관하여 22세에 생을 마감하고 마는 비운의 천재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 청각을 잃고 사랑도 이루지 못하지만 음악에 대한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아 걸작들을 만든 베토벤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5살 때 청각의 기적을 경험하여 자연을 넘어 우주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원리마저 이해할 수 있게 된 엘리아스 알더는 자신을 동경하는 같은 마을 친구의 여동생 엘스베스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청각의 능력은 엘리아스를 음악의 천재로 만든다. 두메산골에서 탄생한 음악의 천재. 그리고 그의 뮤즈 엘스베스에 대한 사랑은 그의 음악의 원천이자 기쁨이 된다. 그녀도 엘리아스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음악의 언어로 표현하는 엘리아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남자를 선택하고 만다.


엘스베스 심장소리도 들을 수 있는 엘리아스. 마을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천재로 인정받지만 다른 남자 품에서 빨라지는 그녀의 심장소리를 들어야 하는 엘리아스에게 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엘스베스가 마을을 떠나고 상심하여 오르간 연주자로 지내던 엘리아스는 우연히 오르간 경연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오라 죽음이여 그대 잠의 형제여"라는 주제로 즉흥 푸가를 연주한다. 청중은 오르간 소리가 하늘을 여는 우주의 기적을 경험하고 그를 찬미하지만 엘리아스는 신의 선물을 받았던 바위로 돌아가 이후로 먹지 않고 잠들지 않으며 생을 마감한다.


다양한 장르와 테마가 뒤섞인, 독일을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인 이 작품에서 음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이기에 독자는 청각의 기적과 하늘을 여는 기적의 오르간 연주를 상상해야 한다. 독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청각적 경험을 상상으로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텍스트로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이 소설의 큰 성공으로 미루어 짐작해본다면 텍스트가 어느 정도는 독자의 상상을 도와주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영화라면?




조셉 빌스마이어의 <Schlafes Bruder>


영화라면 청각의 기적과 하늘을 여는 기적의 오르간 연주의 묘사는 수월할 것 같다. 음향과 이미지의 편집을 통해. 뭐 수월하다고? 반대로 글로 묘사하고 상상은 독자에게 맡길 때나 가능한 것은 아닐까. 우주의 소리를 듣는 청각을 얻었어, 이것은 하늘을 여는 기적의 연주야,라는 자막을 넣지 않고 오로지 음향과 영상으로 어찌 이것을 표현할까.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영화, 그 비밀의 언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영화에서 (자막 등을 쓰지 않고) '다음 날' 이란 전달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다" 다음 날도 어려운데 우주의 소리와 기적의 연주라니.

조셉 빌스마이어의 영화는 로버트 슈나이더 원작 소설의 복잡 다양한 이야기를 엘리아스와 엘스베스의 사랑 이야기로 한정하고 말았고 원작에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각의 기적과 기적의 연주의 재현은 성공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음향과 영상으로 우주와 소통하고 하늘을 여는 연주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칸타타 BWV 56 제5곡이었다.


J.S. 바흐의 칸타타 BWV 56 제5곡


엘리아스 알더의 탄생을 알리는 인트로, 하늘을 열리게 한 오르간 즉흥 연주 그리고 죽음의 엔딩, 이렇게 3장면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베이스를 위한 독창 칸타타 BWV 56 "Ich will den Kreuzgtab gerne tragen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노라" 중 제5곡이자 마지막 곡인 코랄 "Komm, o Tod, du Schlafes Bruder 오라 죽음이여 그대 잠의 형제여"가 흘러나온다. 엘리아스 알더의 일생은 이 곡에 담긴다.


영화가 시작하면 항공 촬영 파노라마로 대자연의 장엄한 스펙터클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 거대한 자연, 험준한 산을 곧 태어날 엘리아스 알더를 받기 위해 산파가 오른다. 위대한 자연과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대비와 조화를 보여주는 이 장면에 바흐의 칸타타 56 제5곡이 흐른다. 자연은 거대하고 인간은 초라하지만 인간의 음악은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장면의 영상과 음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음악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늘을 연 기적의 오르간 연주는 바흐의 "오라 죽음이여 그대 잠의 형제여"를 주제로 한 즉흥 변주인데 이야기의 전개로 보면 절정에 해당한다. 바흐의 칸타타 곡과 엘스베스의 테마를 합친 것으로 엘스베스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럼에도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은 엘리아스 알더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이 장면에서 다시 바흐의 칸타타가 흐른다. 바흐의 음악은 탄생과 죽음을 관통한다. 엘리아스 알더가 떠난 자리, 장면은 멈추고 엘스베스의 아름다운 테마가 흐르며 영화는 끝난다. 언젠가 이 마지막 너무나 아름다운 테마를 다시 한번 이야기할 것이다.


감정을 아끼면 들리는 음악의 선물


원작의 세계를 담기에는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큰 의미가 있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그냥 들어도 모든 것이 이해되는 엘리아스같은 천재인 것처럼 음악을 듣고 있던 나를 부끄럽게 했고, 우주를 담으려는 듯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바흐에 대해 경외심을 품게 하였으며, 위대한 음악은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전 글들에서 연주의 완성은 감정 표현이라고 했었지만 모든 음악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교회음악은 한 인간의 개인적 감정을 표현한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흐의 합창음악 중 상당수가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이었고 칸타타의 경우 진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는 음악 복음서 같은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템포나 세기 등에서 급한 변화는 삼가고 절제된 감정으로 부드럽게 고조된 감정으로 장엄하게 불러야 한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성 토마스 교회 성가대원들이 될 수 있는데 대부분은 활동을 하면서 신앙심이 생긴다고 하니.


결국 바흐의 이 칸타타는 감정을 아끼면 들리는 음악의 선물과도 같다. 감정을 배제하고 가능한 합창 자체에 집중해보기를 바란다. 음악은 인간의 희로애락만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에 기반한 가사이기는 하지만 꼭 종교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처럼 위대한 자연에 대해 보잘 것 없는 인간이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고 세속의 사랑이 범접하기 어려운 한 천재의 아픈 사랑을 떠올려도 좋다.


참고로 마태복음 9장 1절에 영감을 얻어 쓴 시에 곡을 붙인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교회 칸타타 BWV 56의 가사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신도의 삶은 항해와 같아 죽음이 나를 위협해도 신께서 함께 하여 두려움이 없나니 ..... 오라 죽음이여 그대 잠의 형제여 나를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라 나를 예수께 데려가라.... 십자가를 메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한 신도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이 음악을 훌륭하게 연주했는데 영화에 사용된 것은 엔드 크레딧에 나오는 대로 바흐 합창음악의 대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인 칼 리히터 Karl Richter가 만든 뮌헨-바흐 관현악단과 뮌헨-바흐 합창단의 연주이다. 바흐의 칸타타 56은 대개 칼 리히터가 지휘하는 뮌헨 바흐 관현악단 및 합창단과 바리톤 솔로이스트로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함께 연주한 버전을 일순위로 꼽는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bopboy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