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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윈스턴 캐논의 추억


1980년대 후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의 캐논이 한동안 큰 인기를 얻었다. 윈드햄힐(Windham Hill)이라는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한 레이블에서 발매된 뉴에이지의 명반 <December> 앨범 뒷면 첫번째 수록곡. 윈드햄힐에서 발표된 음악들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악기 소리들이 유난히 곱고 투명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소리가 투명하다는 것은 악기가 만든 소리를 가두고 있는 공간에서의 울림에서 군더더기가 대부분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소리의 청아함은 좋은 리버브(Reverb)에서 나온다.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는 찬사를 받는 레이블 현대음악총서 ECM의 음반을 녹음하는 오슬로 레인보우 스튜디오의 리버브는 가히 명품이다. 우리가 키스 재릿의 피아노 독주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이 리버브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지 윈스턴의 <December>에 담겨진 곡들은 하나같이 소리가 맑아 듣고 있노라면 이른 아침 새소리가 들리고 옅은 안개가 살짝 끼어 있는 청정 휴양림에 와있는 기분까지도 들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피아노 솔로곡인 탓에 소리의 울림 하나 그리고 그 여백들이 맑은 공기인냥 파르르 떠는 것일테지만. 하여간 조지 윈스턴의 캐논은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의 레퍼토리 넘버원이 되었다.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제치고. 너도나도 이 곡을 연습했고 여기저기서 이 음악이 들렸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CD가 드물던 시절이라 고물 턴테이블에 용돈을 털어 구입한 LP를 돌리고 그 지글지글거리는 잡음에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다음 등하교길 열심히 들었다. 테이프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쌓인 테이프 화이트 노이즈에 원음의 맑음이 덮여도 여전히 그렇게 아름답게 울리는 곡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 어릴 적 기계처럼 연습하던 피아노 명곡집 수록곡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이 시절 나는 나의 미래가 이 캐논같을 줄 알았다.




Variations?


LP 뒷면 첫번째곡 <Variations on the Kanon by Pachelbel>. Variations?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 파헬벨이라 읽는 것도 대학생 때 알았으니. 억지로 시켜서 하는 피아노가 다 그렇지. 하여간 고전음악을 안 듣는 것이 아님에도 이 단어의 의미를 잘 몰랐다.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이 그 정도로 호기심이 있다면 뭐가 되도 되었겠지. 하여간 "베리에이션"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수백번 음악을 듣고 들으면서 그 뭔지모를 아름다움에만 취했던 것 같다. 게다가 고등학교 이후에는 그렇게 싫던 피아노와 이별하고 기타와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락에 빠져 살았다. 조지 윈스턴의 캐논도 안녕이었다. 파헬벨의 캐논이 돌림노래 같은 다성음악을 만들 때 사용하는 모방기법이라는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 음악에 대해 공부하면서 알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Variations의 의미가 이 음악을 듣기 위한 열쇠라는 것을 알았다.


파헬벨의 캐논은 관련하여 4개의 이야기 써 놓은 것이 있으니 참고할 수 있다. 좋은 글은 아니지만 중요한 몇가지 정보들이 담겨 있다. 매거진을 처음 시작하면서 파헬벨 캐논으로 시작하였는데 도대체 몇 개까지 써야 하나를 고민했었다. 워낙 이야기 거리가 많았으니까. 처음에는 이 매거진을 캐논 관련 이야기로 할 생각도 했었고. 하여간 이 글까지 하면 벌써 5번째 언급인 셈이다.



위 글들을 읽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파헬벨 캐논의 구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저음 악기가 첫 두 마디를 끝날 때까지 반복하고 이 위로 바이올린 3대가 똑같은 선율을 시간차를 두고 연주하는 전형적인 캐논. 바로크 시대에는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라는 음악 기법이 유행했는데 첼로 등의 저음 악기가 저음을 계속해서 연주하여 전체 사운드에 무게감을 주면서 동시에 화성을 보충하였다.




변주곡(Variations)이란


음악에서 Variations는 변주곡이라는 뜻이다. 복수를 의미하는 s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변주곡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J.S. 바흐의 아름다운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에도 s가 붙는다. 변주곡이라고 할 때 제목을 Variation이라고 표기하는 곡은 내가 아는 한 없다. s가 붙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러 개의 변주"이니까. 즉 변주곡이라고 하면 변주들의 모음으로 보면 된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변주한 것인가. 그래서 변주 모음에 앞서 항상 주제(theme)가 먼저 나온다. 주제에 이어지는 곡들은 당연히 이 주제에 의한 변주들이다. 그리고는 변주1(var.1), 변주2(var.2)로 표기한다. 친절한 곡들은. 이 정도면 변주곡의 기본 개념 정도를 이해한 것이다. 다음의 그림으로 정리되는.




조지 윈스턴의 캐논은 변주곡이다


조지 윈스턴의 캐논 제목을 다시 보자. Variations on the Kanon by Pachelbel. 주제는 파헬벨의 캐논이다. <파헬벨의 캐논을 주제로 하는 변주곡>. 제목과 방금 위에서 언급한 변주곡의 개념으로 이 곡을 분석하면 처음에 파헬벨 주제가 나오고 이어서 변주들의 모음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곡은 첫 4마디가 주제이다. 그리고 이 4마디를 주제로 한 4마디짜리 변주가 22번 이어진다. 그래서 92마디. 마지막 엔딩 한마디까지 해서 총 93마디. 보시다시피 곡의 구조는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주제는 파헬벨 캐논의 첫 두마디 1-5-6-3-4-1-4-5 화음 진행을 네마디로 늘린 것일 뿐이고 이어지는 22개 변주도 주제의 화음 진행 기반으로 선율을 붙인 것이다. 이것이 이 곡의 전부이다.




그런데 이전에 들어왔던 음악들과는 매우 큰 차이 하나가 있다. 4마디 변주 22개는 주제의 화음 진행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화음 진행에 대해 22개 버전의 프레이즈를 만들고 주루룩 이어 붙인 것일 뿐이다. <아기염소>처럼 A가 장조라면 B는 단조로 분위기를 바꾸고 다시 장조의 A로 돌아가던 ABA 삼부형식이나 <엘리제를 위하여>처럼 반복과 대조가 몇번 나타나며 극적 전개를 펼치는 ABACA  론도형식에 비해 매우 색다른 형식. 이렇게 되면 연주하는 방법도 듣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쌩얼과 화장의 차이


주제와 변주의 관계에 대한 비유는 변주곡의 개념을 보다 확실하게 잡아줄 것이다. 첫번째 비유는 쌩얼과 화장. 주제가 쌩얼이면 22개의 변주는 22가지 화장한 얼굴이다. 성형을 하지 않는 한 화장이 옅건 짙건 기본 얼굴은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성형에 비유되는 변주 방식도 있다. (다음 편에 다룰 예정) 다양한 악세사리와 장식으로 치장하더라도 주제가 변하지는 않는다. 두번째 비유는 스케치와 채색. 주제가 연필 스케치라면 22개 변주는 채색의 과정이다. 어떤 구간에서는 4마디 변주가 반복되는 것 같이 들리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칠을 더해 나가는 과정이다. 몇 개의 변주는 주제를 반복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만 본다면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미니멀리즘 음악같기도 하다.





하나의 변주는 두번 사용되지 않는다. 그 중요한 반복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들린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다. 파헬벨 캐논의 화음 진행을 그대로 이용한  AABA 형식의 대중가요도 그 화음진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대중가요와도 유사하다. 주제가 계속 들리지만 지루하지 않은 것은 4마디 주기로 계속해서 새로운 얼굴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계속 바뀌는 화장을 인지하려면 약간의 몰입이 필요하다. 이 곡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매우 짧은 4마디를 주기로 변주를 진행한다. 따라서 변주의 시작과 끝을 파악하는데 어렵지 않다. 매우 친절한 변주곡인 셈이다.





청각의 경험만을 통해 얻어지는 음악적 정보의 양은 극히 제한된다. 음정의 정확함, 연주의 숙련도, 악기 소리, 뉘앙스, 리버브 등 시각적으로 확인이 어려운 정보들이 대부분이다. 시각화가 어렵기 때문에 눈으로 읽는 정보로 전환도 어렵다. 그런데 음악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음악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악보에 담겨진다. 악보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담은 음악의 언어로 작성된 문서이다. 우리는 천재가 아니므로 듣는 것만으로는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 깊은 이해를 원한다면 악보를 그려 보라 권하고 싶다. 악보 그리기는 까다롭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의외로 음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 의미와 역할을 찾게 해준다.






변주 12는 Trans-Siberian Orchestra의 <Christmas Canon Rock>이라는 곡의 키보드 반주와 동일한 형태이기도 하다


조지 윈스턴의 캐논은 캐논이 아니다


조지 원스턴의 캐논은 캐논이 아니다. 변주곡이다. 한 성부가 시간차를 두고 다른 성부를 모방하는 대위법의 하나인 캐논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주제와 주제에 의한 변주라는 변주곡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파헬벨의 캐논에 사용된 화성진행과 선율을 재료로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변주곡을 만든 것이다. 이제 들어볼 시간이다. 첫 4마디는 주제이다. 이어지는 4마디 변주 22개. 4마디씩 구분하여 들으면 된다. 약간 긴장해도 좋다. 4마디씩 잘라 들어야 하니. 4마디마다 주제에 의한 변주가 들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 음악의 가장 중요한 매력 포인트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어릴 적 피아노를 한참 칠 때 생각이 난다. "이 곡은 변주곡이야. 주제를 듣고 이후 등장하는 각 변주를 잘 들어봐. 주제가 어떻게 바뀌고 화장을 하고 채색이 되는지..."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엄마는 이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 더 중요한 분이셨다) 이 곡은 체르니나 베토벤 소나타같은 레슨의 주요 교재곡이 아닌 혼자 치는 히트곡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물론 <엘리제를 위하여>가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란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의 피아노는 달라졌을까.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졌을까. 그런데 최소한 피아노 치는 로보트처럼 연습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피아노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냥 기계처럼 연습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싫었을 뿐이었으니까.


언젠가 내 아이도 피아노를 연습할 날이 오겠지. 아이에게 피아노는 연습해야 하는 악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친구같은 존재가 되도록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소원이다. 잘 치기 위한 훈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아이가 피아니스트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의 연주는 스스로를 웃기고 울려야 하고 아이 옆에서 엄마 아빠도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연주를 한 시간 5분은 행복해진다. 그런 5분이 하루가 되고 1년이 되고 30년이 된다. 글을 쓰려다보니 다시금 피아노 음악들을 많이 듣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요즘은 엄마에게 감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쨌거나 엄마는 하기 싫어하는 나를 달래가며 피아노를 가르쳤으니까. 아이가 좀더 크면 난 이 피아노 음악을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엄마가 화장할 때를 생각해봐. 엄마가 더 이뻐지잖아. 이 곡은 말이야. 처음에는 그냥 엄마 얼굴같아. 그런데 듣고 있다보면 어느새 화장한 엄마 얼굴처럼 예뻐져. 이것이 변주곡의 매력이란다."



이 글을 포함하여 총 3회에 걸쳐 "변주곡의 늪"이라는 부제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은 변주곡의 개념 정리를 위한 워밍업에 해당한다. 다음 회 그리고 그 다음 회에는 모차르트의 변주곡 하나, 베토벤의 변주곡 하나, 바흐가 남긴 변주곡 불후의 걸작 하나 그리고 보너스 한 곡이 우리를 "변주곡의 늪"에 빠뜨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저 허우적거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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