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일기를 쓰지 않았다. 과거로 편입된 내 인생 대부분은 시간의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중 극히 일부가 나의 기억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한 장의 이미지 파일로 살아 남아 있다. 신기한 일이다. 내 인생의 어떤 한 순간을 담고 있을 그 이미지들은 어떻게 잊혀지지 않고 그 오랜 시간을 버텨낸 것일까. 그 동안의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그 이미지들은 필름 조각들인 셈이다. 그래서 그 필름 조각들에 남겨진 이미지를 기록으로 남겨보기로 했다. 십년 이십년 전 밀린 일기를 쓰는 느낌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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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1학년 김동률은 전람회라는 듀오를 결성하고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재즈 풍의 멋진 곡인 <꿈 속에서>를 부르고 대상을 탔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4년 5월 <기억의 습작>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싱어 송라이터가 되었고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멋진 음악들을 발표하는 스타 뮤지션으로 활동 중이다.


부러웠다. 나도 그 때 음악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로부터 2년 전 겨울 나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전자공학과를 두고 고민하다가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뭐 하는 곳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멋있어 보여서 했던 선택.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 정도로 대학 진학과 진로에 관심이 없었고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라셨고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관심이 없던 분이셨으니.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때 만일 덜 멋있어 보였지만 더 재미있었을 것 같았던 건축공학과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혹시 1년 후배들과 트리오를 결성해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으려나. 지금 우리 가족들은 내가 직접 설계한 멋진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으려나. 그래서일까. 어쩌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때면 늘 김동률의 노래를 부른다. 가녀린 성대에 노래에는 코딱지만큼의 재능도 없으면서 용기 내어 대학가요제 무대에 선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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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정말 열심히 했다, 당구를. 1학년이 끝났을 때 에버리지는 200. 학과 공부는 한 적이 거의 없으니 학점도 비실비실 (BCBC)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그래도 FD는 없어 재수강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실은 그 전에도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은 별로 없었다. 중딩은 물론이요 고딩 때조차도 난 집에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술 먹고 이런 이야기하면 어떻게 연대 갔냐며 너 재수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술 먹고 왜 거짓말을 할까. 난 엄연히 커트라인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신기하긴 하다. 가족 식사 때에도 어쩌다 옛날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라고 한 적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네가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 한번 들으면 절대 까먹지 않는 초특급 기억력의 소유자? 오히려 그 반대다. 한 귀로 들어 온 지식은 잠깐이라도 머물렀다 나가면 좋으련만, 한 귀로 바로 빠져 나가버리는 저주받은 기억력의 소유자가 바로 나다. (이에 반해 내 아내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그리고 8세 아들 션은 엄마를 닮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은 초딩에게도 가르치는 <수학의 정석>도 고딩 2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접할 정도로 난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음악, 특히 락 음악. 이성에 눈 뜰 나이에 난 락 음악과 연애를 하면서 사람 여친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능도 억누를 정도의 그 위대한 사랑을 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락 음악과 나누고 있었으니. 물론 피아노는 집어치운지 오래지만.


중딩 때에는 수업 시간 외 공부를 해본 적이 없고 고딩 때에는 학교가 아닌 곳에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시험 잘 보는 요령의 요정이 나와 함께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끔 할만큼 성적은 괜찮았다. 그러니까 연대를 갔겠지. 공부를 아예 안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야자 타임을 잘 활용했다. 하지만 대학은 그렇게 요령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요령의 요정은 주관식 문제 풀이에 글쓰기까지 해결해주진 않았으니까. 대학교 1학년은 그야말로 패닉 그 자체였다.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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