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스내처 에 이어서

앞선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 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루는 주제들을 나열하면 이렇다. 외계인의 무력없는 지구침입 → 감정이 결여된 인간의 복제 → 인간의 의식구조 지배 → 현실 순응자로의 양성 → 최종적으로 지구 정복...

여기서 외계인을 기계 (또는 로봇) 으로, 감정을 결여시키고 의식 구조를 지배하는 것을 가상의 환각 세계를 주입하는 것으로, 현실의 순응을 파란약을 먹는 것으로, 그 내용을 교체하면 바로 <Matrix> 의 설정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매트릭스> 에서 기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인간 신체 강탈 측면이 가장 명확한 '바디 스내칭' 인 것도 같다. 신체는 그대로 두고, 그 의식 구조에서 식욕만을 남겨 놓게 되면 그때는 좀비가 되기도 한다.

와쇼스키의 <매트릭스> 삼부작의 주요 설정을 잠깐 살펴 보자면 이렇다. 인간이 탄생시킨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류는 A.I. 로봇을 폐기처분하지만, 살아남은 로봇들이 스스로 진화해서 결국 세상을 장악하게 된다. 인류는 급기야 기계의 에너지원인 태양빛을 차단시키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인류는 기계에게 패배하고 만다. 기계는 인간의 몸을 가두고 목 뒤에 빨대를 꼽고 인간의 생체로부터 에너지원을 빨아 그 기계의 수명을 연장하고, 대신 생체 에너지가 뽑히는 인간의 의식에 일종의 환각 세계인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공간을 주입한다.

그런데 네오는 빨간약을 선택해서 먹고 자신의 의식에 심어져 있던 매트릭스를 빠져 나와 진실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목 뒤에 꽂힌 빨대를 뽑아냄으로서 기계의 종속에서 벗어난다. 이 영화에서 '빨간약 줄까 파란약 줄까', 라는 일종의 시험은 '의심과 진실', 아니면 '편안과 순응',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였다.

존 카펜터의 <They Live 화성인 지구정복> 에서 나다는 프랭크로 하여금 선글래스를 착용하고 세상을 보게 하기 위해 한사코 거부하는 프랭크와 치열한 주먹질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선글래스는 빨간약처럼 진실에 접근하도록 하는 각성제같은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선택' 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나다와 프랭크의 그 싸움은 강요를 해서라도 진실을 보게 하려는 감독의 처절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현실을 의심하고 빨간약을 삼키거나 선글래스를 낄것이냐, 아니면 현실에 순응하고 그냥 편안하게 살기 위해 파란약을 먹거나 선글래스를 안낄것이냐, 하는 이 '선택'의 문제는 <바디 스내처> 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단히 중요한 주제로 설정된다. 마일즈와 베키는 복제된 지인들로부터 계속해서 강요를 당하면서도 도망을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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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어떤 강한 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 힘에 의해 의식을 지배당하도록 스스로 순응하느냐, 아니면 의식을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그 힘을 피해서 도망 다니느냐, 가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 를 이끌어 가는 커다란 줄기인 셈인데, 여기서 외부의 어떤 강한 힘은 사실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돈 (자본)' 또는 '경제'일수도 있고, '이념'일수도 있으며, '종교'일수도 있다. 아니면 공포를 조장해서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일수도 있고...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때였으니만큼, 창작물의 주적대상에 매카시즘도 포함이 되었을 것이며, 아마도 이 매카시즘을 저주하는 수많은 작가 및 영화 예술가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돈 시겔 (Don Siegel) 이 아마 그 중 한명이었던 듯 싶다.

매카시즘 (McCarthyism) 에 대해서는 조만간 생각 정리를 한번 할 생각이다. 늘 그랬지만 최근 정부의 정치 철학이 유독 매카시즘과 더 닮아 있어서... 일단 간단히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안보 및 애국심의 코드를 발동시키는 거짓말들을 늘어 놓고, 공권력을 쥔 자가 법적 질서를 무시해도 될 만한 공포를 조장하여 사회의 신뢰도를 무너뜨린 다음, 언론의 수수방관 아니면 휘어 잡은 다음 정치가는 거짓 선동을 한다. 그리고 저항하는 시민들과 각성시키려는 지식인들을 마구 잡아 넣고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고... 이게 매카시즘의 실체다. 파시즘, 나치즘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메이저 언론은 '선택'의 순간에서 늘 파란약을 삼켜온 셈이다.

셀지오 레오네와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 미학에 눈뜨고 미국에 돌아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하여금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두번째로 다시 일깨운 사람이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두번째 스승이라는 돈 시겔... 이 둘 합작 최고 걸작은 <Dirty Harry 1971>. 무법의 서부 건맨이 무법의 샌프란시스코 형사로 변신하여 매그넘을 휘두르며 사이코 범죄자를 쫓는 내용의 反영웅주의 및 형사 영화의 고전이다. 이 영화는 아쉽게도 국내에서 DVD 로는 아직 안 나온 것 같다.

1950년대 돈 시겔은 'B급영화의 거장' 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저예산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 한 작품이 잭 피니의 <바디 스내처> 를 영화로 만든 <신체 강탈자의 침입 The Invasion of Body Snatchers 1956> 이다. 이 흑백 영화 타이틀로 원작 소설의 제목도 영화 타이틀로 개제되기도 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는 소설의 내용에 기반하고 있지만, 조금씩 다른 부분도 조금 있고 일단 그 결말이 원작 소설과 다르다.

어느날 의사인 마일즈 베넬 (케빈 매카시) 에게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그 사람같긴 한데 뭔가 이상해요... 감정이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마일즈는 일종의 과대망상으로 치부해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댄 카우프만에게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발생함에 따라 원인모를 집단 히스테리를 의심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여자친구 베키 드리스콜 (다나 윈터) 과 함께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야..." 라는 집단 히스테리가 전염병인지, 일시적인 유행인지 걱정하며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문제의 실체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같은 마을에 사는 작가이자 친구인 잭 벨리첵의 집 지하에 있는 당구대 위에서 씨앗인지 고치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것 같은 미완성의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잭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된다. 그러니까 진짜 잭이 있고, 잭이 되어가고 있는 복제물이 공존하는 요상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는거다. 오리지날이 도플갱어가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같은...


그리고 그 동일한 현상이 베키에게서도 심지어 마일즈 자신에게까지도 발생하는 것을 목격한 마일즈는 식물이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중단시키고 그녀도 구해내지만,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모두 그 식물들에 의해 감정이 결여된 채로 복제가 되어가고, 그 의식의 세계가 잠이 든 틈을 타 복제의 과정은 완성되면서 그 감정은 사라지고 생존의 본능만이 남아 결국은 마을 전체가 외계인의 지배를 당하게 된다.

마일즈와 베키는 외계인의 인간 말살과 도시가 장악되는 과정을 공포에 떨며 지켜보면서 복제 인간들의 위협과 추격을 뿌리치고 (원작 소설에서처럼) 마을 끝까지 가고 거기에서 대량으로 길러지는 식물들을 발견한 후 그것을 불태우고 마을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이후의 과정은 원작 소설과는 다르므로 궁금한 분들은 두 작품 모두 직접 확인하기를...

냉전시대에 공포와 선동의 정치의 대명사인 매커시즘을 그 외계인이 지구로 침투시킨 식물로 본다면, 복제된 인간들과 도망가는 두 주인공의 의미도 분명해 질거다. 누구건 그 식물의 열매로 복제된 인간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겠지만, 현실의 세계에서는 대부분 파란약 꿀껌 삼키고 스스로 잠을 자며 의식을 잠재우고 그 뇌에 매트릭스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복제가 되어 그 힘을 전파하면서 생각이라는 에너지원을 빼앗기며, 그 사실을 알아도 그냥 순응하고 체념한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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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외부에서 침입자로서의 물리적인 공격은 없지만, 내부에서 싹튼 집단적인 사회적 순응과 체념이라는 것의 공포를 잘 형상화하고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흑백이라 심리적 불안과 편집증적 불안이 더 커진 것 같기도 한데,

그 공포가 우리가 잠이 든 사이 그러니까 그 의식의 휴면 상태를 파고 들어 그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 광선총을 들이대는 외계인이 아닌 우리의 이웃들과 가족들과 친지들이 그 식물을 들고 나타나 나의 의식을 억압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영화는 (소설에서도) 경고한다. (특히 난 우리나라 엉터리 뮤지션과 TV스타들에게서 이런 공포를 너무 심하게 느끼곤 한다.)


소설이건 영화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침입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를 알아 채는 거다. 그 정체불명의 침입자 후보의 대상 중 하나로는 경제 (또는 자본) 에 대한 공포일수도 있으며 (사실 그 가능성 매우 높다, 특히 우리나라의 요즘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냉전시대에 잘못 건드리면 크게 당했던 반공사상이 조장하던 공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보기에 따라서는 소련같은 공산권 국가 침략의 공포라고도 하는 이들도 있고...

어쨌건 중요한 것은 의식을 지배하는 이런 공포의 대상은 꼭 외부에서 총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 스스로 현실에 대한 순응과 체념을 유도해서 생성되는 것일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 집단 순응에 반대하고 그 순응의 대상의 진정성과 의도에 대해 의심하고 빨간약을 먹어 그 진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그 누군가가 우리 주변에 조금씩은 꼭 있어야 한다는 거다. 특히 TV 같은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진 사람들 중에.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돈 (자본) 이건 권력이건, 매카시즘 같은 공포건, 어떤 커다란 힘 앞에서 파란약을 삼키고 순응과 체념하는 인간의 모습... <매트릭스> 나 <신체 강탈자의 침입> 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혹시 지금 나의 실체가 실은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그 힘에 의해 복제된 인간이며, "내가 과연 나일까..." 라며 의식이 깰 때마다 파란약을 삼키며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나, 자신부터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공포의 광풍, 생각보다 쉽게 만들 수 있고, 이 공포의 소용돌이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체념하는 것도 생각보다 쉬운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용돌이 속에서 "너는 과연 너냐? 복제된 인간이 아니고..." 를 질문하는 영화들과 책들과 예술작품들이 끊임없이 나와야만 한다.

현실 순응에 저항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 대중예술계를 점령한 이들 과연 어떠한지...?  우리나라 스타들 대개 철저하게 '현실 순응'을 조장하는 그 선봉대장들 아니던가?  이것이 그래서 TV 를 꺼야 한다는 주장의 이유이기도 하다.
 

2008년 9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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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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