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넝마시장 일부


어느 날 우연히 처음 들은 시 한 편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니까 인생 시(詩). 그런 시는 심장부터 알아본다. 터질 듯 박동이 커지고 온 몸이 일제히 박자를 맞추면서 거대한 울림이 생긴다. 내 몸에 무슨 일이 났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몸의 울림에 머리가 동참하면서 인생은 전율이라고 부르는 이 상황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20대 중반이 넘도록 시를 전혀 읽지 않던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시가 세 편이나 존재한다.


자기 소개서에서도 밝혔듯이 내 인생의 중요한 만남은 대부분 대학생 시절에 이루어졌다. 어느 해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느날과 다름없이 연대 중도 6층 출입구 쪽에서 수학 문제 풀이로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굳이 다소 소란스러운 곳을 찾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들릴 듯 말듯 나지막한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소음을 차단시켜야 좀더 집중을 잘 하는 공부 습관으로, 나는 공부를 할 때면 늘 뭔가를 들었다. 시가 들렸다.

 

◇◇◇◇


나는 오늘 세상의 끝에 있는 꿈의 넝마시장에 갔다 

거기엔 모든 게 있었다 

쓰다버린 물건, 망가진 물건, 중고품과 고물이 된 꿈의 도구들 

좀구멍이투성이의 양탄자, 때려부순 성상, 별, 

변발들, 열쇠가 없는 녹슬고 썩은 공중누각들, 

한때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는 머리가 떨어져 나간 인형들  


이 모든 잡동사니 속에서 뜻밖에 

나는 우리들의 사랑인 아름다운 꿈을 발견했다 

그 황금빛은 흐려지고 그 모습은 훼손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되돌려주고 싶어서 

창백한 얼굴의 사내에게 값을 물었다 

그는 이빠진 웃음에 헛기침을 하며 

턱도 없이 높은 값을 불렀다


그 꿈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지만 나는 계속 값을 깎았다 

그러나 사내는 완강하게 깎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꿈을 되살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잘 지내지 못하며 더 이상 부자도 못되고 있다 

이렇게 마음이 공허한 적은 나에게 일찍이 없었다 

그 꿈은 팔린 것일까, 그 꿈이 어떻게 그 곳까지 갔을까

<꿈의 넝마시장> by 미하엘 엔데   


◇◇◇◇


시는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이루지 못한 게 아니라 쓰다 버린 것이구나. 넝마시장 어딘가 처박혀서 또 다시 누군가 사주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 그러나 여전히 열정을 품고 있을 내 꿈을 나는 쓰다 버린 것이구나. 되사려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 하는 나의 꿈. 시의 한 구절 그대로, 그렇게 마음이 공허한 적은 나에게 일찍이 없었다. 착잡했다. 문제 풀이를 멈추고 책을 덮고 도서관 2층으로 갔다. "도대체 이런 시를 쓴 미카엘 엔데라는 사람은 누굴까"  


도서관 컴퓨터에 앉아 미카엘 엔데를 검색했다. 인터넷은 아직 없던 시절. 미카엘 엔데의 책을 검색하고 서고 위치를 파악한 뒤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이 시가 어느 책에 들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운이 좋았다. 찾아낸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도. 산문인지 시인지 아리송한 글을 모은 꽤 낡은 책, <조나단 길프씨의 허무한 인생 이야기>를 빌려 바로 옆 복사실에 제본을 부탁했다.   


제목과 번역만 다를 뿐 모두 다 똑같은 책이다  


지금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라 불린다. 동화를 읽었는데 현대 사회의 씁쓸함을, 수필을 읽었는데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우화를 쓰는 이 독일 작가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1973년 발표한 <모모 Momo>가 가장 유명하다. 사람들을 일과 시간의 노예로 만들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회색 인간들과 싸우는 떠돌이 소녀 모모의 이야기. 어른을 위한 동화이자 아이들을 위한 철학 이야기. 정말 멋진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모모> 이후 1979년 <끝없는 이야기 The Neverending Story>를 거쳐 1986년 발표한 시집이 <꿈의 넝마시장 Trödelmarkt der Träume>이다. 벼룩시장이 좀더 보편적인 표현이겠지만 난 넝마시장이라는 표현이 좋다. 처음엔 <초록빛 세상>, 1990년 <조나단 길프씨의 허무한 인생 이야기>, 1999년 동일 번역으로 <인생>으로 재출간되다가, 2005년에 다른 번역에 아예 책의 컨셉 자체를 바꾼 듯한 <꿈을 낚는 마법사>로 다시 나왔다. <꿈을 낚는 마법사>는 어른을 위한 번역은 아닌 듯 무게감이 좀 떨어진다.   


◇◇◇◇


<조나단 길프씨의 허무한 인생 이야기>는 이 시집에 담겨진 시들 중 하나로 시라고 하기에는 우화에 가깝다. “반드시 더 나은 것이 온다구” 더 진실한 사랑, 더 멋진 여인, 더 멋진 직업을 기다리며 지금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길프씨가 때가 되어 신 앞에 섰는데 그 때에도 “선택은 천국과 지옥, 그 두가지 뿐입니까”라며 결국 영원 속에서 빈둥거리게 된다는 이야기. 도서관 2층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 말과 글로는 표현 못할 나에 대한 연민에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야 했었다. 그 후 지금까지 이 시를 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조나단 길프씨의 허무한 인생 이야기 중 일부  


내가 쓰다버린 그래서 중고가 되어 넝마시장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내 꿈의 값은 그 이후로 계속 올랐을 것이다. 지금은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생을 처음 그 '꿈'을 넝마시장에 내다 버린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건가. 스무살 꿈의 번복에 대해 지금도 자주 후회를 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미 버려 되살 수도 없을 꿈의 노예가 되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 때 삶이 괴로워지기 시작하고 인생이 후회로 피폐해지기 시작하려던 그 때 들렸던 두번째 인생 시는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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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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