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서 1

자기 소개서 2 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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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중도 6층 출입구 쪽 자리에 앉아 태어나 처음으로 문제 풀이의 참맛을 느꼈던 그 해 여름 방학, 6층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한 사람. 나처럼 6층을 서식지로 둔 족속인가.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 그녀 자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데이터 구조론과 알고리즘에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Blue> 사운드트랙 음반. 전산학과(지금의 컴퓨터공학과)에 영화 매니아구나..." 


주중이건 주말이건 아침 일찍 중도 6층에 등교해 그녀가 왔는지부터 확인했다. 왔으면 마냥 즐거운 하루, 안왔으면 괜히 우울한 하루. 즐거움과 우울함이 교차하는 몇 개월을 보낸 후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녀를 따라 일생일대 용기를 내어 나도 훌쩍 올라타서 다급히 건넨 첫번째 인사. "우리 인사나 하고 지내요" 그로부터 첫번째 식사를 함께 하기까지는 또 다시 몇 개월이 걸렸다.


전산학과 4학년에 영화광인 그녀와 음악광인 나. 우리는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서 금새 친해졌고 그녀는 나의 첫번째 여자친구이자 마지막 여자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남 6개월 만에 그녀는 KAIST 전산학과에 진학하면서 대전으로 갔고 우리는 주말 커플이 되었다. 토요일마다 만나 종로와 대학로에서 영화를 봤다. 아니면 공연을 보던가. 과외 2개로도 부족해졌다. 연인의 문화 생활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필요했으니까.


내가 KAIST에 진학한 이유이기도 했던 그녀는 KAIS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외국을 오가며 한동안 로보틱스 관련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경력을 다 내려놓고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정도급의 인생 전환이 이루어지려면 어떤 계기가 존재한다) 박봉에 거의 매일 이어지는 야근, 그럼에도 더 행복해하는 아내에게 나는 늘 이야기한다. "바꾸길 정말 잘했어" 인생은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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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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