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씨네큐브 극장에 갔다가 배창호 감독을 보았습니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잘 알려지지 않은 체코의 거장 감독인 Jiri Menzel 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추측이 되네요.

가까이서 본 기차줄 위의 종달새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는 수많은 영화가 제작되고 있겠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 얼마나 많을까요... 음악이나 책도 마찬가지겠지만 숨겨진 보석들을 찾아 내었을 때의 즐거움만큼 설레고 짜릿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요...
     
어제 관람한 이 두 편의 체코 영화도 보석같은 작품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50,60 년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작품이면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체코 영화이기 때문이었는지 영화의 스타일이나 연출 방식 등이 다소 낯선 듯 하면서도 동시에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달하는 그 메시지는 지금 시대에도 변함없이 마음을 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리 멘젤 감독이 28세에 만들어서 1968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던 가까이서 본 기차는 체코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인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독일에 점령당한 체코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쟁 상황이라는 불행한 시대이지만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체코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리 멘젤  감독... 폭격 공습 장면에서조차 부서진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사의 모습같은 블랙코미디를 선사하여 4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네요.
 
비둘기 키우는 것이 취미인, 속물스러우면서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역장, 여자들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울 게 많은 선배 흐비치카와 함께 일하게 된 역무원 견습생 밀로시와 그의 여자친구 마사... 이들을 둘러싼 조금은 엉뚱하지만 소박한 이야기를 통해 영화 내내 웃음을 선사하죠.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이 먹먹해진 가슴때문에 그 동안의 웃음이 한순간에 그만 슬픔으로 뒤바뀌게 되구요...

진격해 오는 독일군 탱크 앞에서 최면을 걸어 탱크를 돌아서게 하려 했던 밀로시의 할아버지처럼, 등장인물들은 암울한 전쟁 상황에서도 진지하거나 심각한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런 순수한 인물들의 모습은 비정한 전쟁의 현실과 대비되어 기차 위에 흩뿌려지는 반짝이는 눈발의 흑백화면만큼이나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마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 대책없는 낭만주의자 밀로시 역을 맡은 바츨라프 네카르시는 1968년작 줄위의 종달새에서도 비슷한 역을 맡습니다. 이 영화는 프라하의 봄 당시 제작되었지만 소련의 침공으로 상영금지가 되었다가 22년만인 1990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하여 그랑프리를 거머쥔 비운의 명작입니다.


인간보다 체제를 중시했던 공산주의 하의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면서도 역시 풍자와 유머를 잃지 않는 이 작품은 강제노동으로 억압되어 있지만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통해 고철처리장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휴머니즘을 그려냅니다. 영화 초반에 체코 정부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영상을 촬영하던 장면에서 "코리아", "부산"등을 언급하며, 미제국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구호가 나와서 약간 놀라우면서도 재밌더군요.

이 두 영화의 원작자인 보흐밀 흐라발의 작품 중 가까이서 본 기차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기도 합니다. 무기나 탄약을 실은 열차를 지칭하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라는 제목이 가까이서 본 기차보다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

이야기가 나왔으니 비슷한 소설을 한 권 더 추천한다면 나치 치하에서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아주 짧은 소설 처절한 정원입니다. 평범한 인물들이 그려내는 이야기이지만 그 결말이 가까이서 본 기차만큼이나 감동적이어서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운좋게도 이리 멘젤 감독의 작품을 몇 년전에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에도 몇번 언급했던 <Ten Minutes Older : The Cello> (2002) 라는 옴니버스에서도 멘젤 감독의 10분짜리 단편영화인 One Moment 를 볼 수 있습니다. 이 10분간의 영상을 통해 인생의 허망함, 나이먹음에 대한 연민을 아련하게 그려내고 있구요.

2007년 5월 20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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