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보고 다큐에 나름 감흥을 받았던 분들, 혹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할매꽃>, <살기 위하여>, <길>, <3xFTM> 등의 다큐는 들어 보셨나요. <워낭소리> 를 포함한 이 여섯 작품은 2009 다큐프로젝트인 <다큐 프렌즈> 의 라인업 입니다. 독립영화배급사네트워크가 배급하는 2009 상반기 다큐멘터리 라인업이기도 하죠. 매월 한 편씩 개봉합니다.

<워낭소리> 는 뜻하지 않은 대박이 나기도 했죠. 하다보니 어떻게 개봉한 네 작품은 모두 보았는데, 찔끔찔끔 쌀쌀맞게 비 내리는 지난 토요일 모처럼 명동 <인디스페이스> 를 찾아서 본 <살기 위하여> 가 가장 인상에 남네요. <워낭소리> 에 비할 때 이미지의 힘은 훨씬 역동적이며 메세지도 훨씬 강렬합니다.


<살기 위하여> 의 카메라는 계화도 어민들의 고달픈 삶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어민들 삶의 터전은 새만금 갯벌과 그 앞바다였죠. 지금은 바닷길이 막혀 바짝 말라가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고달픈 삶' 이란, 어민으로 산다는 것의 고달픔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국민'의 고달픔, '평생을 살아 온 도로부터 외면받는 도민'으로서의 배신감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극렬한 저항과 시위에도 불구하고 막혀 버린 바다. 바닷물을 완전히 막아버리고는 그 방조제로 떼거지로 몰려와 히히덕 거리며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민국 만만세'를 부르는 현대건설 사람들과 정부 및 전북 도청 관계자들의 모습을 보며 계화도 갯벌과 앞바다가 제공하는 생선과 조개를 잡아 팔아 먹고 살았던 어민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워낭소리> 를 보고 흘리는 눈물이 소와 노인에 대한 동정의 막연함이라면 <살기 위하여> 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삶에 대한 구체적 연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극기는 저런 사람들이 저렇게 아무데서나 그리고 아무때나 흔들라고 만든 것인가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꼴보기 싫은 태극기의 모습을 이 영화에서 또 한번 보았습니다. 정말 꼴도 보기 싫었죠. 거기서 태극기는 대체 왜 흔드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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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1년으로 이미 오랫동안 진행되던 사업입니다. 그리고 새만금 간척사업 취소청구 소송은 2005년 1월 시작되었죠. 그 해 2월 1심 법원은 사업을 재검토하라며 농림부에 패소 판결을 내립니다. 농림부는 항소를 합니다. 그리고 2006년 3월 16일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고 정부의 손을 들어줘 버립니다. 그 동안에도 방조제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고 결국 새만금의 바다는 막히고 세계 5대 갯벌이라는 그 갯벌은 사라지고 그 바다는 담수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죠.


바닷물이 들지 않는 갯벌과 엄청난 돌덩이들로 막혀 버린 바다에 사는 게, 조개, 생선들이 죽어 나가는데 계화도 어민들은 살 수 있을까요. 고달프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계화도의 먹이사슬이 파괴됩니다. 평생 그 조개들과 생선들로 먹고 산 사람들이니까요. 정부가 찔끔 보상금 몇 푼 손에 쥐어 준다 한들 그들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해서 먹고 살겠습니까. 농사를 지으라구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얽혀 있는 땅과 바다를 돈으로 그렇게 맘대로 처분하는 것이 과연 정부의 권리일 수 있을까요? 그것이 참 궁금하네요. 물론 그들에게는 그들의 거대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만 보이겠죠... 그저 보상금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천직을 빼앗고 돈주면 그만이라는 발상이죠... 아메리칸 원주민과 다를까요... 인생은 돈으로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련만.

생각해보면 농촌과 어촌을 떠난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려와 모두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도시는 참으로 치열하고 무서울 곳일 수 밖에 없죠. 반면에 젊음이 사라져 버리자 팍 늙어 버린 시골을 지키는 늙은이들은 그들의 터전을 마구 훼손하는 거대 집단의 힘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도시는 비열하고 시골은 참으로 슬픈 시대입니다.

정부와 현대건설은 경찰과 용역깡패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시위와 반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막이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물론 물러날 곳이 없는 계화도민들, 전북도민 그리고 시민단체들도 반대시위를 했죠. 그러나 그곳을 취재하는 언론은 시위의 본질은 흐리고 엉뚱한 아젠다만 만들어 내고, 환경단체들도 깨갱 그저 꽁지를 내립니다. 하긴 삶의 투쟁은 본디 당사자의 외로운 싸움이긴 하죠. 하여간 언론이란...

<살기 위하여> 는 2006년 3월 대법원 판결 전후 새만금 앞바다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는 피해자 당사자인 계화도 어민들의 외로운 마지막 투쟁, 내부 갈등, 가난한 어민으로서의 삶, 그리고 국가로부터 당한 배신과 슬픔, 을 담담히 담아 낸 다큐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방조제에 물대포를 쏘며 해수유통을 열어달라는 해상시위를 하자는 절박한 어민들의 요구는 대책위의 애매모호한 판단에 계속 묵살되기 일쑤고, 보다 못한 여인네들이 나서서 극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 땅의 남정네들의 그 비열한 무기력함에 그야말로 씁쓸한 썩은 미소만 지을 뿐입니다. 반면 그 여인네들에게서는 굉장한 힘을 느끼기도 하죠.

참 순진하면서도 너무 답답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 배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강한 어부가 아닌 무기력한 남정네들과 갯벌을 지켜내기 위해 거침없이 소리를 지르는 그 여인네들의 대비 또한 대단히 강렬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 짠하게 올라오는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테러리스트가 되어 다이너마이트를 방조제에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기도 하죠.

전라북도의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에 걸친 앞바다에 방조제를 세우고 그 안쪽을 농토로 바꾼다는 대규모 새만금 간척사업. 앞으로 세월이 흘러 그 바다가 완전히 단단한 땅이 되면 그 땅 위로 무엇이 세워지고 만들어질까요? 농토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도대체 누가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까요? 모두들 도시로 도시로 떠나 도시의 천국이 되어 버린 이 나라에서.

나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 어부의 어린 딸은 시인이 되어 그 땅에 만들어진 것들을 보며 이 땅에서 실종된 지식인의 '비판'이라는 것을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극장을 나서는데 이미 어둑해져 버린 그 비오는 명동거리는 왜 그렇게 낯설고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2009년 4월 27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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