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보통 20~30 편의 영화를 본다. 그리고 약 3~5 편 정도를 블로그에 후기로 남기는 것 같다. 그런데 블로그 기록으로 남겨지는 간택의 명분은 훌륭한 작품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본 직후 비교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거다. 도리어 "이건 꼭 써야겠다" 하는 작품들은 주로 번번히 때를 놓치고 결국은 안쓰게 되기도 한다.
 
지난 5월에도 본 영화 편수는 꽤 되는데 극장가서 본 영화는 박찬욱의 <박쥐> 딱 한 편이다. 어제 봉준호의 <마더> 를 보았으니 최근 두 달에 걸쳐 극장에서 본 영화는 <박쥐> 와 <마더> 가 전부. 그런데 이 두 영화는 "이건 꼭 써야겠다" 라는 분류에 속한다. 그래서 일단은 짧게라도 남겨야지 아쉬움이 안 남을 듯 해서 일단 간단평을 끄적이기로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대단히 훌륭하다" 이며, 굳이 별점을 주라면 별다섯에 별다섯을 기꺼이 줄 것이고, 서로 스타일은 다르지만 미학과 철학적 관점 심지어 사업가적 관점에서마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게 성찰을 요구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둘 다 상업영화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난 이 점을 대단히 환영한다. 한국영화의 지향점이라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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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는 뭐랄까 철학적 사유의 여러가지 아젠다들을 겹겹이 포개 놓고 김밥 말듯 돌돌 말아 놓은 듯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돌돌 말린 것을 도마 위에 펼친 다음 겹겹이 포개진 의제들을 한겹 한겹 벗겨가며 드러나는 주제들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기고 종합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런 영화는 보고 난 후 바로 이야기하고는 싶지만 솔직히 바로바로 쓰기가 어렵다.

가령 성(性), 유혹, 욕망, 이성, 윤리, 죄의식, 이런 아젠다들이 떠오르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엮어내야 할까, 라는 감은 일단 잡히긴 한다. 허나 그것을 블로그 텍스트로서 술술 풀어내기에는 사전에 처리해야 할 작업들이 몇가지가 있다. 최소한 영화가 직접 참조한 레퍼런스에 대한 리뷰 정도는 필요하다. 그런 리뷰없이 바로 덤빌 경우 경험상 (내가 보기에는) 나중에 삭제해도 무방한 텍스트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하여간 <박쥐> 라는 영화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 이 심각하게 던지는 "인간은 성적 욕망 앞에 과연 윤리를 포기하고 망상과 죄의식에 사로 잡혀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에 대한 문제 제기를 기반으로 <드라큘라> 가 던지는 "인간은 육신의 생명과 영혼을 기꺼이 교환하고 마는 존재인가" 라는 본능적 탐욕의 속성과 종교적 강요 윤리 사이에서의 갈등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해보라고 제안한다.

이런 메세지에 이미지 미학을 더하고 나면 상업성은 웬만해선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찾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 또한 들 수 밖에 없다.


<박쥐> 이후로 간만에 극장에서 본 봉준호의 <마더> 는 "정말 훌륭한 영화" 다. 별다섯에 별여섯을 주고 싶다. 솔직히 <마더> 의 엄마가 삶이건 외모건 진짜 나의 엄마를 너무 닮아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등을 보면서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박찬욱의 영화와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박쥐> 가 '김밥 말기' 스타일이라면 <마더> 는 '떡 썰기' 스타일 같다. 여러가지 주제를 혼합하기는 하는데 겹겹이 포개어 놓고 하나하나 벗겨야 알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봉준호는 각 주제들을 썰어서 가지런히 접시 위에 그냥 그대로 담는다. 그렇다고 숫자 퍼즐마냥 이리저리 뒤섞지는 않는다. 사전 작업해야 할 레퍼런스도 그다지 필요없다. 그냥 직설적이다. 다만 깊은 사유를 요구한다. 봉준호의 개성이면서도 강점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박찬욱은 "이게 뭘까" 를 고민하게 하지만 봉준호는 "왜 이렇게 되어야 하나" 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영화 <마더> 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슬픈 이야기라 눈물이 날 지경이다. 엄마와 사고 능력이 떨어져 어딘가 모자란 듯한 아들. 그러니 엄마는 일일이 아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를 주지시킨다. 그것이 약한 아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아들을 보면서 <프랑켄슈타인> 에서 그 피조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러쿵 저러쿵 이상한 괴담을 유포시키는 그 중심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어머니 스스로 행하는 살인 사건 수사 과정을 끝까지 다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마음이 참 아파 오고 좀처럼 힘을 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감독은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좀더 거시적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 같다. 국가와 국민, 경찰과 시민, 학교(또는 선생)과 학생, 변호사와 피고인, 의사와 환자, 그리고 부모와 자식 등등, 이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는 보호 시스템이 지금 상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마더> 에는 수많은 약자가 등장한다. 그저 쌀 한바가지를 얻기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여고생에서 동네 건달에게 이용만 당하고 경찰의 폭력에 저항 한번 못하는 엄마와 아들까지. 끔찍한 사회. 이 영화에서는 특히 약자로서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고통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이 여고생을 지키지 못하는 학교와 어른들과 사회와 이 나라... 정상인가.

제2의 보호자가 되어주어야 할 친구들은 이 위태로울 정도로 삭막해진 사회에서 한 어린 여성의 신체 강탈자가 되어 있을 뿐이다. <플란다스의 개> 에서도 묘사된 바 있는 룸싸롱에서 놀고 자빠지며 약자의 고통을 담담히 즐기는 기득권층의 상징인 교수, 의사, 변호사, 검사, 소위 '사'자 직군들. 그러나 이들은 원래는 이 사회의 약자들을 지켜주는 보호자의 범주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인물들이다.

<마더> 의 엄마는 그 모든 약자의 고통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다. 엄마 스스로도 정말 힘겹게 살아가는 약자에 불과하지만 그보다 더 약자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강자가 되어야 한다. 약자가 강자가 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러니 엄마는 '씻김춤'을 출 수 밖에 없다. 이런 것들을 하나 둘 생각하다보면 <마더> 는 마음만 너무 아파 오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2009년 6월 4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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