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갓 지난 어린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문화 생활이라면, 미술 전시 관람 또는 야외에서 자유롭게 감상하는 음악회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종류의 전시라면 많이 찾아보려고 애쓰는 편인데, 평소에 좋아하는 동화 작가의 원화 전시가 열린다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운좋게도 초대권을 얻게 되어서 전시 기간이 얼마 안 남은 지난 주말, 부랴부랴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고릴라>, <동물원>, <돼지책>, <터널>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작가인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전작 31권의 원화 280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이번 전시는 8월 30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장의 입구에서는 "마술 연필을 가진 꼬마 곰" 시리즈의 꼬마 곰이 손을 들고 반겨 주고 있었고, 천정에는 "꿈꾸는 윌리"가 조형물로 만들어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벽면에 배치된 그의 사진은 30년 경력의 동화 작가라고 하기에는 꽤나 젊어보이는 맑은 외모로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대부분 작은 사이즈의 원화 그림들 사이사이로 크게 배치된 벽화들이 전시장을 경쾌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고릴라"가 소녀를 안고 날아가는 그림이라든지, "축구선수 윌리", "우리 엄마" 등을 확대해서 그려놓은 알록달록한 벽화들은 어린 아이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포인트가 되고 있었고, <터널>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아이들이 직접 기어들어갈 수 있도록 한쪽 벽에 작은 통로가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그의 첫 작품인 <코끼리 책>의 그림들은 원색적이고 환상적이면서도 굉장히 귀여워서 그림책을 꼭 소장하고 싶었는데 아마존에도 검색이 되지 않는 걸 보니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전시회 팜플렛에 사용된 그림인 "윌리우드"는 동화 <꿈꾸는 윌리>에 들어있는 그림으로 킹콩, 오즈의 마법사, 찰리 채플린,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일곱 난장이, 타잔 등의 등장 인물들이 총출동하는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며, <겁쟁이 윌리>에 등장하는 빨간 트레이닝 복을 입은 침팬지 그림도 너무나 귀여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재미있는 그림도 있고,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영향이 선명한 그림들도 있었다. <미술관에 간 윌리>와 <행복한 미술관>의 장면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그림들 중에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응용해서 그린 재치있는 작품들이 꽤 많다. 덴마크 출신의 동화 작가로서 앤서니 브라운의 동반자인 한나 바르톨린의 전시도 조그맣게 함께 열리고 있었고,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들을 소재로 미디어 아트를 창작한 이이남 작가의 멀티미디어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어린이 문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비롯하여,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 컬트 매스클러 상 등을 수상하고, 영국 계관 아동문학가라는 명예까지 얻은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 세계는 꽤나 독보적이다. 그림 스타일이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기도 하지만, 동화 속 이야기들 역시 매우 신선하면서도 심오하다. 그는 동화책 그림치고는 굉장히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편이지만, 때로는 "마술 연필을 가진 꼬마 곰" 시리즈의 꼬마 곰처럼 간결하고 단순한, 그래서 친근하고 만화같은 캐릭터도 등장시키며, 동시에 초현실적이고 엉뚱한 상상력을 그림으로 펼쳐내기도 한다.



또한 그가 들려주는 동화의 이야기는 밝고 순수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때로는 어둡고 우울하며 현실 비판적이고, 어른들이 보아도 날이 서 있는 풍자와 유머가 담겨 있다. 물론 아이들이 보아도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지만,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내용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평범한 아이, 평범한 가족, 평범한 이웃에게서 볼 수 있는 사실적인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묘사되며,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깊숙이 파고든다. 따라서 동화를 보고나서도 뭔가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긴 여운을 남기고,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질문이 마음속에 계속 맴돌게 만든다. 

이번 전시는 좋아하는 작가의 원화와 스케치를 보면서 그 상상력의 공간을 생생하게 느끼고, 아름다운 색감을 감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여러 인용구로 접하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그림책을 보는 방법에 대한 그의 조언은 다음과 같다.
 
"내 생각으로는 그림을 자세히,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배경에 있는 작은 것들까지 포함해서요. 그것이 제가 어릴 적 그림을 보던 방법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도움이 되거든요."

실제로 그의 동화책 그림 속에는 미묘한 상징이나 비밀스러운 암시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얼핏 보면 알 수 없는 작은 단서들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그림 속에 숨겨 있어서 때로는 마치 퍼즐이나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그의 동화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또한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그의 섬세한 관찰력이 지금의 그의 그림체를 만들어 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물어보면, 나는 무엇보다 최대한 주의깊게 보라고 일러준다."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물들을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그의 익살스러우면서도 은유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내 책 속의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은 말하는 마법의 동물들이 아니다. 이들은 실제 사람의 메타포이며, 어린이들은 이들과 자신들을 쉽게 동일시하는 것 같다."

이러한 메타포를 이용하는 그의 동화 속 이야기들은 더욱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메시지를 더욱 의미심장하게 전달하는 신기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아이를 키우기 전부터도 종종 그림책을 사서 읽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 백퍼센트 동의하는 바이다.

"그림책은 나이가 들었다고 접어야 할 책이 아니라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림책은 정말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보고 즐기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며, 우리가 잊고 있던 순수함과 상상력, 그리고 솔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되찾아 주는 마법의 책이다. 앞으로도 더 멋진 동화책들이 많이많이 출간되고 전시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 8월 25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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