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존 터투로가 연기를 잘 한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바톤 핑크>로 깐느 남우주연상 수상한 걸 비롯해서 코엔 형제와 많은 작품을 했고, 특히 <빅 레보스키>에서 보라색 옷을 입고 볼링하던 모습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음. 그가 과연 연출도 잘 할까?  놀랍게도 그는 1992년에 연출 데뷔작 <맥 Mac>으로 깐느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두번째 연출작 <일루미나타 Illuminata>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 <일루미나타>는 20세기 초 미국 동부의 어느 극장을 배경으로 하여 배우, 작가, 스탭, 극장주(제작자), 비평가, 관객들이 빚어내는 유쾌하면서 날카로운 풍자극이다. 예고를 보고서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극장을 찾았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담고 있는 멋진 영화였다.

위트 넘치는 대사들과 함께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 영화는 연극과 현실을 뒤섞으면서, 연극이란 것이 얼마나 인생과 닮아 있는지 배우란 어떤 존재인지, 예술가의 고뇌와 예술산업의 천박함이 얼마나 모순을 빚어내는지를 속사포처럼 현란하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권위로 똘똘 뭉쳐 거드름 피우는 비평가는 분노한 관객에게 야유를 받지만, "Critic! You don't like Anything."  거만한 그는 무대에서 배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뱉는다.  "Some actors would do Anything for good review."

일부 관객들은 오만한 자세로 자신의 지적 수준을 뽐내거나, 아예 연극을 이해하는 건 비평가의 몫이라며 스타에만 열광한다. 이 와중에 관객과 비평가의 반응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극작가의 신경과민은 극에 달한다.

"This is no profession for an adult." 라고 극중에서 표현된 배우들은 또 어떤가. 재판에 기소된 와중에 재판정에 관중이 많이 올지를 신경쓰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관객이 모여들 때까지 죽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으로 가득찬 그들은 일상 생활에서 늘 연극 대사를 인용해서 읊어대고 쓸데없이 드라마틱하게 오버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극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내던지는 이들이며, 그들이 최고의 열연을 하는 순간에는 우리는 그들의 숨소리 하나에까지 몰입하게 된다. 존 터투로가 자신의 연극의 예고편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던 순간에 그의 마력에 가까운 카리스마는 관객의 숨소리까지 멈추게 만들고, 그의 실제 부인이자 여주인공인 캐서린 보로위츠는 미세한 동작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침부터 밤까지 언제나 연기와 실재를 오고가야 하는 그들은 연극 안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고, 실제 삶에서는 연기로 위장하며, 하루 종일 감정 과잉과 과장된 연기 속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극중 대사에 나왔듯이 무대와 현실은 그야말로 겨우 커튼 하나로 구분될 뿐이고, 카메라의 시점은 무대와 객석과 무대 뒤를 향하면서, 그 연기와 현실이 엉킨 미로 속을 안내한다.

영화는 연극처럼 1막, 2막 등으로 나누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섬세한 인형극(꼭두각시극)은 정교한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전반적으로 산만하고 과잉되어 보이는 연출 스타일은 언제나 극적이고 호들갑 떨며 오버하는 연극인들의 특성 그 자체를 닮아있다.


연극을 주요 소재로 한 영화는 종종 있지만, 자끄 리베트의 <알게 될거야 Va Savoir>(2001), 우디 알렌의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 등 배우들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연극이란 것이 얼마나 인생과 닮았는지를,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선 현실보다 모방이 더 진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처럼 잘 표현한 영화는 드물다.

워낙 쟁쟁한 배우들이 나오는 데다가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모두의 연기가 훌륭했지만, 속물스러운 게이 평론가 역할을 한 크리스토퍼 월큰의 연기는 정말로 대단하다. 공포 분위기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섬찟해지는 그의 마스크는 이 코미디 안에서 미묘한 포스를 뿜어대며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했던 Fatboy Slim 의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 "Weapon of Choice" 에서 탭댄스를 추면서 기괴하면서도 엉뚱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그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한다.

2008년 1월 1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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