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즐링 리미티드>와 함께 상영되는 단편 <호텔 슈발리에>을 보다가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Where Do You Go To (My Lovely)" 를 듣는 순간, 내가 웨스 앤더슨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음악과 색감과 주인공들의 엉뚱함과 과묵함, 그리고 전형적인 캐스팅으로 자신만의 영화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감독이다.

게다가 늘 비슷한 캐릭터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웨스 앤더슨 표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고, 형제들은 묘한 경쟁심으로 서로 부대낀다. 안젤리카 휴스턴으로 대표되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차갑고 냉정하며, 아버지는 항상 존재감보다는 빈 자리로 다가온다.

전작 <로얄 테넘바움>(2001) 의 화려한 핑크빛 색감에서 인도 특유의 화려한 색채로 변화된 화면 배색은 이국적 풍취를 물씬 풍기고, <스티브 지소의 해저생활>(2004) 에서 잠수함 내부로 설계되었던 폐쇄적인 세트는 좁고 답답한 인도 횡단 열차 침대칸 안으로 옮겨졌다.


영화 <다즐링 리미티드>는 역시 동어반복과 같은 비슷한 주제에 단골로 등장하는 배우들을 재료로 삼고, 또다시 형제들의 옥신각신을 그려낸다. 그렇지만 특유의 썰렁함과 엉뚱함은 왠지 다시금 새롭게 느껴지고, 철없는 형제들과 함께 떠난 인도 여행은 어느새 넌지시 정신적 위안을 가져다 준다.

어쩐지 당연히 등장하리라 예상하게 되는 빌 머레이는 한층 나이 든 모습으로 잠시 카메오 출연으로 나올 뿐이지만, 신기하게도 주연 이상의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단편 <호텔 슈발리에>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나탈리 포트만도 그렇고...

특유의 긴 얼굴이 우울한 느낌을 자아내는 애드리언 브로디는 의외로 웨스 앤더슨 사단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웃겨야 하는 웨스 앤더슨 표 코미디에서 그의 기이하게 기다란 슬픈 얼굴은 웃음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내는 듯하다.



서먹했진 형제 간의 관계도 회복하고, 인도에 있다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겸, 맏형 오웬 윌슨의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인도 횡단 열차 "다즐링 리미티드"를 타고 세 형제가 여행을 떠난다는 이 로드무비는 자칭 이 여행을 "spritual journey"라고 부르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습지도 않은 비밀들과 유치한 편싸움와 고자질이 난무하는 겉모습만 어른인 소년들의 어설픈 모험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몇천불짜리 구두와 벨트에다가 마크 제이콥스가 디자인한 루이 비통 여행가방 풀세트를 갖추고서 여행하는 이 버릇없는 도련님들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줏대없어 보이는 동시에, 생명의 고귀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유치하기 때문에 순수하고, 미성숙하기 때문에 여린 감성은 이들의 약점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부분이며,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유치함을 돌아보게 되고, 우리 자신의 가족과 형제를 잠시 그리워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웨스 앤더슨을 응원하게 된다. 바깥 세상에 대한 염려보다는 자기 자신의 세계에 빠져 엉뚱한 영화를 만들어 대긴 하지만, 이렇게 철저히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니까. 그리고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서 이만큼 개성과 색깔이 뚜렷한 영화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2007년 12월 26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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