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2007)

OLD POSTS/영화 2013. 12. 27. 10:27


2005년의 <Brokeback Mountain>에 이어 또다시 여성 작가의 단편소설을 재료로 하여 장편영화를 만든 이안 감독의 신작 <색, 계>는 1940년대 중국 역사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침략자에게 충성했던 민족의 배신자와 그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은 젊은 여성 사이의 강렬한 애증을 그려낸다. 두시간 반이 넘는 영화 내내, 긴장감을 좀처럼 늦출 수 없었던 이유에는 스파이와 암살 작전이라는 긴박한 스토리 텔링도 한몫 하지만, 가장 팽팽한 긴장감은 두 주인공 "이"와 "왕치아즈" 간의 숨막히는 "색"과 "계"에 의한 것이다.


친일파 간부라는 "이"의 위치와 역사적 대의를 위해 온몸을 바치는 "왕치아즈"의 위장된 신분이 물론 줄거리를 탄탄하게 만들고 있지만, 두 인물 사이에 오고가는 묘한 눈빛과 격렬한 정사는 철저하게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야생 동물들 간의 경계와 염탐, 한시라도 마음을 놓았다간 처참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목숨이 건 기싸움이 진행되는 것이다. 서로 지지 않기 위해, 섣불리 공격하다가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만, 단순한 적대관계로만이 아니라 동물적인 욕망으로 서로 이끌리는 두 존재, 이들은 제어하기 힘든 본능의 늪에 빠져서 육체적 경계를 허무는 동안에도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연륜으로 보나 소유한 권력으로 보나 우위를 점할 것으로 보여지는 "이"는 늘 빈틈없는 처신을 유지하는 반면, 다소 충동적으로 저항 운동에 뛰어든 왕치아즈는 가끔씩 흔들리는 눈빛으로 위태로운 불안감을 드러내곤 한다. 과거 홍콩에 있던 시절, 여닐곱명의 동료들이 겨우 한 명의 적을 죽여야 하는 우세한 상황에서도 어설프고 미숙하기만 했던 그녀의 극단 동료들처럼, 젊음이란 주체할 수 없는 혈기만 넘칠 뿐 아직 비정함과 냉정함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왕치아즈가 이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장면을 제외하고는, 정신적, 감정적인 교류를 나눌 여유도, 서로에게 조그만 틈도 허용하지 않았던 이들의 관계는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남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는 관객의 판단일 것이다. "계"로 이겼으나 "색"으로 굴복하든지, "색"으로 이겼으나 "계"에서 속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쓸쓸함과 비애만이 남을 뿐이다.

<상성>(2006) 에서 악역이 왠지 어색했던 양조위가 이번에는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비정한 중년의 이미지로 시대의 부역자를 제대로 그려내고 있다. 탕웨이의 앳된 외모는 왕치아즈의 당차면서도 여린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적중한 것 같다. 이안 감독은 특정 소재, 특정 시대를 찍더라도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에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색,계>의 시대 배경은 그 감정과 상황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되고 있긴 하지만, 시대가 만드는 비극이건  개인의 욕망에서 나오는 비극이건, 결국 모두 다 인간의 본성이 빚어내는 암울한 비극이니까.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개인의 욕망이 맞이한 슬픔은 채석장의 깊은 심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었다.


2007년 12월 14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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