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OLD POSTS/영화 2013. 12. 27. 16:47


관객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왠지 자꾸 보기를 미뤄 왔던 이 다큐영화를 며칠 전 밤에 명동의 조그마한 극장을 찾아가서 보고 왔습니다. 일본인이 많이 다니던 이 화려한 명동 거리 속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던 CQN 극장은 약도를 보지 않고 갔더라면 아마 절대로 찾지 못했을 것 같은 조그만 극장이었구요.

아마도 평소에 가지고 있던 "민족"이나 "전통" 같은 단어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조선학교를 세우고 언어와 문화를 지켜나가는 재일교포에 관한 영화"라는 소개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중에서야 극장을 찾게 된 이유는 아마도 포스터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가 자꾸 생각나서이기도 하거니와 영화감독인 아내(조은령)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 끝내지 못한 작품을 남편(김명준)이 완성했다는 다소 로맨틱한 제작노트 때문이었습니다.


지친 퇴근길에 2시간 넘는 다큐라 졸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밤11시쯤 극장을 나와서는 엔딩에 흐르던 아름답던 노랫말이 귓가를 맴돌더군요. 현재 일본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는 교포3세이기도 한 윤영란씨가 만든 우리를 보시라 라는 곡의 가사입니다.


그 언제나 나를 보는 눈길들 내가 서는 자리마저 하나없듯이
마음을 숨기며 발자취도 감추고 세상에는 저 혼자라 알아왔네
단 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동무들이 나를 나를 이루어주고
두 팔을 크게 벌려 여기 오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마음껏 배워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의 해빛이 아름답고 고운 그 모습을 그려 살리라

굽이굽이 돌아드는 이 길을 함께 가니 푸른 하늘이 열리여있네
조선옷 입고서 얼굴 바로 들고서 날마다 학교가는 이 기쁨아
불리우는 이름을 몰랐었네 자란 곳이 다른 줄을 몰랐었네
더는 헤매지 말고 웃어 보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참되게 살아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의 해빛이 아름답고 고운 그 모습을 그려 살리라


영화를 보고 나서 '민족'이나 '애국'에 대한 평소 생각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뭔가 다른 것들을 많이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 포기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어려운 상황을 꿋꿋이 버티어 내는 선생님들과 아이들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본 다큐멘터리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인 <송환>을 보았을 때와 조금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요...

나보다도 훨씬 어린 학생들이 일본에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맞닥뜨려야 하는 난관은 생각보다는 결코 만만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인데요...

재외교포들, 특히 2세 이후 세대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서는 그냥 막연하게 "일본에서 교포2세로 자라 네이티브 일본어를 구사하면 큰 차별은 받지 않을 수도 있겠다..." 서양 국가들의 경우라면 외모의 차이에서 출발하는 이질감에서부터 상당한 혼란과 정신적 방황, 때로는 차별을 겪으리라 생각하지만 같은 동양권이라면... 라고 생각했던 내가 참 얼마나 무지했었는가를 이 영화를 보고 깨닫게 되었구요.

일본에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어 오긴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외모로는 잘 구별이 되지 않을 경우, 즉 한국인임을 숨길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한국인으로 살아갈 지, 일본인인 척하고 살아갈 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8살 코흘리개부터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고3학생까지 일본땅에서 자신의 의지로 검정 저고리를 입고, 조선인으로서 살겠다는 신념은 선뜻 이해를 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굉장한 용기가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인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같은 조선학교들은 정식학교로 인정받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고 하네요. 인정을 못받으니까 그나마 학생 수도 점점 줄어 들고 있고, 학교의 수도 감소하고 있다고 하구요.

자기 아이에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는 어린 나이일 때부터 집을 떠나 멀리 있는 학교 기숙사로 보내 거기서 생활하게 해야 하고, 정식 고등학교 졸업으로 인정을 못 받기 때문에 대학 입시를 보려면 따로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일본어로 대화하면 훨씬 더 편할수도 있는 이 아이들은 서투른 한국어로, 그리고 어설픈 한글 실력으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연습합니다. 이상한 극우파가 학교로 전화를 걸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한국 정부에서 아무런 관심도 지원도 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밝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죠.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의 경우, 조선학교에 대해 꾸준히 지원을 해 왔으며, 학생들은 수학여행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여행오려고 해도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저 연예인의 잔치일 뿐인 한류 바람 같은 거 말고, 어쩌면 이 아이들이야말로 정말 우리들이 관심을 쏟아야 할 이들이 아닐까요...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일본어 억양이 심하게 묻어나는 어색한 표현의 우리말이 왜 그렇게 정답고 귀엽게 들리던지요... 우리를 보시라 같은 곡도 교포3세가 만든 우리노래인지라 어떻게 들으면 일본풍도 느껴지고, 북한억양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아름답고 소박한 학교정서가 잔뜩 묻어나는 노래 아닌가 합니다.     

북한의 핵무기나 국제적인 경제 상황 등으로 인해 극우파가 더 득세하고 있는 일본에서이 아이들의 미래는 사실 그렇게 밝지는 않을 것이고 더 어려운 상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입시 생지옥에 갇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자라는 한국 학생들보다는 이 아이들이 훨씬 더 강하고 튼튼하고 순수할 것 같네요. 경쟁보다는 서로 아끼는 문화 속에서 친구처럼 가깝고 가족처럼 든든한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아이들은 성장해 나가고 있으니까요... 원래 이것이 우리의 학교 아니었던가요?

왜 조선의 옷을 입고 한국말을 배우냐는 질문에 앳된 얼굴의 남학생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국에 살고 있으면, 내면에서만 지키고 있어도 한국인으로 살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내면에서만 갖고 있으면 외부의 일본의 문화에 계속 동화되게 되니까, 외면에서부터 지켜나가야 합니다...." 라구요.


2007년 6월 12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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