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OLD POSTS/서적 2014. 1. 7. 22:31


우리나라 TV 드라마를 볼 때마다 가장 진부하고 전형적인 설정은 연인들의 사랑에 대한 부모의 반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로 외부의 방해물로 인해 극적인 내용이 전개되는 사랑 이야기는 수없이 많았지만, 대개는 집안의 반대를 변형한 다른 종류의 방해물들을 소재로 활용하는 것이 보통이지, 우리나라 드라마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부모의 엄청난 반대가 이야기의 중심 축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싶네요.

현대 문명을 받아들인 국가에서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못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설정임에 분명합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 두 남녀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걸 막을 자유가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1967년, 그러니까 미국에서 흑인의 지위가 극도로 낮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보더라도, 영화에서 흑인 남성과 결혼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딸의 결정에 대해 소극적인 반대를 하던 부모도 결국에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데 말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결혼에 대한 영향력은, 단지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부모에 대한 공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며, 아시아 문화권 안에서도 독보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미스테리를 최근에서야 풀 수 있었습니다. 답은 경제에 있었더군요.

우석훈, 박권일이 쓴 <88만원 세대> 에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현재 평균적인 20대는 동거를 하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윤리적인 잣대 때문이 아니라, 보다 더 강력한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동거를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세대라네요. 평균 월급이 88만원에 불과한 이들이 집을 구하고 가재도구를 사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옥탑방 고양이 수준의 위태로운 생활에 뛰어들 용기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결혼비용, 정착비용, 주거비용 등을 감당할 만한 소득이 없는 이들은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독립 절차를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즉, 부모의 동의나 허락 없이는 결혼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죠. 이는 동거 문화가 눈총을 받지 않는 이탈리아에서 천유로 세대들이 경제적인 곤궁으로 인해 결혼 연령을 늦추게 되는 이유와도 유사해 보입니다.


이와 같은 동거에 대한 경제학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대간 불균형, 세대간 착취에 대해 분석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신자유주의의 유입에 따른 양극화의 문제만이 아님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88만원 세대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분석을 통해, 왜 그들이 공무원 시험과 고시 공부에 목맬 수 밖에 없는지, 왜 88만원 세대들은 경제 마케팅과 정치 마케팅에서 소외당하고 있는지 설명합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유럽에서는 젊은 커플들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어떤 사회적 장치들이 보장되는지, 일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만족도와 안정성이 우리나라에 비해 왜 월등히 높은지 등을 통해 대안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랄한 사회현상들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불법 다단계 판매와 조직 폭력배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쁜지,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비싸고 질낮은 프랜차이징이 번성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게다가 이 책은 이론과 분석만을 제시하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88만원 세대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과 방안들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위 알바 노동의 최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는지,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하게 되면 어떤 좋은 일들이 발생하는지, 인질 경제의 한 형태인 현재의 사교육 광풍을 대학 개편을 통해 어떻게 완화시킬지, 비정규직의 비율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중소기업에 대한 고용 안정을 높일 수 있는 정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태 고용이라는 방식이 어떻게 일자리를 늘리고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지, 농업 공무원이라는 제도로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고, 농업을 살릴 수 있는지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해낸 가장 중요한 일은, 이들 세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전의 386세대나 X세대와 달리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현재 20대들에게 저자들은 잔인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명칭인 승자독식 세대 또는 배틀로열 세대가 아닌 88만원 세대라는 안쓰러운 이름을 붙여주었고, 이 용어는 지금 큰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

이 책을 읽은 이후에 저는 온갖 주유소에서, 주차장에서, 편의점에서, 음식점에서 시간제 계약으로 일하는 것이 뻔해 보이는 10대, 20대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주유소, 주차장에서 하루종일 유해가스를 들이마시며 미소지어야 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가혹한 공장노동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청소년들과 겹쳐 보이기도 하구요.

현재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을 착취하는 사회, 젊은 세대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모는 사회, 그러니까 미래가 없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건 우리사회 전체에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죠.

지금 당장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가능한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 <88만원 세대>를 추천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를 위해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들을 위한 정책이, 그들을 위한 법 개정이, 그들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방송사에서 현재 만들어 내고 있는 드라마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안 그래도 미래가 막막한 젊은이들이 돈이라는 치사한 수단 때문에 사랑에 대한 선택권까지 윗세대들에게  빼앗기는 비참한 현실을 엉터리로 포장해서 보여주면서, 기성세대들의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는 역겨운 쇼에 불과합니다.

만약 방송사가 정말로 젊은이들을 위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면, 안정적인 전문직에 종사하는 10% 미만의 선택받은 계층, 또는 1%도 채 되지 않을 재벌 2세들은 이제 제발 그만 등장시키고, 젊은이들의 90%에 해당하는 비정규직과 계약직 인생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지를- 거짓 희망이 아닌 진실된 희망을 -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2008년 1월 8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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