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5년 전에 자살로 판명되어 종결된 사건에 대해서, 타살이었다는 제보가 갑자기 들어온다. 망년회 자리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던 고칸 서장은 급히 수사팀을 꾸리기 시작하지만, 이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내일까지이다.

초반부터 이렇게 긴박한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거의 만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흐른 뒤에 사건을 재조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사팀이 의존해야 하는 건 허술한 검시 기록과 용의자들의 증언 뿐...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특출한 능력을 지닌 탐정, 형사, 또는 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의 <종신 검시관>에서 나왔듯이) 등 주인공의 날카로운 추리력과 분석력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범인을 밝혀야 하는 이 사건에서는 무엇보다도 관할 경찰서 전체의 팀웍이 가장 중요하게 묘사된다.

주요 용의자 세 명에다가 가벼운 용의자도 여러 명...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정보와 물증과 증언을 종합해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경찰관들은 각자 비장한 사명감을 내보이며 감탄을 자아낸다.

사소한 단서라도 수집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수사관들의 활약이라든가, 꼼꼼하게 자료 정리를 하면서 수사를 보조하는 내근 경관들의 철두철미함, 취조실에서의 예리한 심리전 등을 매우 현실감있게 묘사하는 작가의 능력은, 그의 오랜 기자 경력에서 나온 디테일 묘사의 진수를 보여준다.

또한 긴밀하게 협력해서 단서를 잡아내야 하는 긴박함 속에서도 동료 형사에 대한 경쟁과 견제 심리를 드러내는 장면이나, 예전에 범인을 끝내 잡지 못하고 공소 시효를 넘기고만 "삼억엔 사건"에 대해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미조로기 계장의 고뇌를 보고 있노라면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형사들의 집념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렇게 긴박한 수사가 전개되는 건 소설 후반부에 잠시 나올 뿐이고, 소설의 대부분은 용의자들이 자백하는 회상장면, 즉 15년 전 고등학교 시절, 기말고사 시험지를 교무실에서 훔쳐내려는 세 악동의 치기어린 젊은 날을 그려내고 있다. 악동들의 단순한 장난이 살인사건을 비롯한 여러가지 범죄와 얽히게 되었고, 숨겨져 있던 진실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

범죄에 어떤식으로든 연루된(실행범이든, 공범자든 목격자든 간에) 사람은 일생동안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사악한 범죄자는 평생 그 기억을 곱씹으며 즐길런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나 악몽에 시달리거나, 마음 한 구석에 어둠을 간직한 채로 사는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약하고 심약한 사람들의 인생은 그 어둠에 의해 점점 파괴되어 회복 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인간이 만든 범죄이든, 사회가 만든 범죄이든, 아니면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변해버린 범죄든, 정당방위이든 아니든 간에, 괴물같은 범죄의 존재는 여린 영혼을 파괴한다. 인간은 소외된 채, 양적 성장에만 치중해 온 이 사회에서 상처받고 낙오되는 존재들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말한다.

그나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한줌의 좋은 추억이라고... 나쁜 기억만 있다면 이런 절망스런 세상에서 견딜 수가 없을 거라고...
회상 장면에서의 세 악동들은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어 학교에서는 소외되지만, 기죽지 않고 건들대면서 함께 뭉쳐다니며 젊음을 소비한다. 때로는 한심하게도, 무책임하게도 보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의리를 지키고 선의를 내보이는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 만약 친구들 간의 우정, 혈기가 없었다면 학업 낙오자로서의 막막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인간애가 묻어나는 좋은 추억들이 없다면, 나쁜 기억들만 있다면, 삭막하고 험한 이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서바이브할 수 있을까...

2008년 1월 8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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