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인기 시트콤 <Friends> 를 볼 때마다, 일찌감치 부모에게서 독립해서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모습이 꽤 낭만적으로 보여서 부러워하곤 했었습니다. 세남자와 세여자로 구성된 친구들은 다들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까지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지만, 뉴욕에서 그럭저럭 여유로운 생활을 해나가는 데 별 문제가 없어 보였죠.

조이와 피비가 가끔씩 재정적 어려움을 코미디로 승화시키기는 했지만, 그건 그 둘의 직업의 특수성 -- 연기나 음악 등 예술 직종 종사자들의 불안정성 --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시즌이 거듭될수록, 경제적 곤궁에 대한 소재는 점점 사라진 편입니다. 가끔씩은 "뉴욕에서 저만한 크기의 아파트 월세를 내려면, 그래도 돈이 꽤 들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가벼운 시트콤에서 굳이 따질만한 문제는 아니었죠.

최근 읽은 소설, 천유로 세대는 뉴욕이 아니라, 밀라노의 한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세 남자와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 자체의 발랄함은 한 편의 시트콤이라 부를 수 있지만, 이들이 한 아파트에 함께 사는 이유는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라, 재정적인 절박함 때문입니다. 1,000 유로의 수입으로는 대도시에서 집세, 융자금 등을 내고 나면 생활비로도 빡빡하니까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여럿이 함께 모여 살게 된거죠.



천유로 세대 (Milleuristi)란 매달 1,000 유로 가량의 수입을 벌면서 집세, 고지서, 생활비, 세금에 맞서느라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소비해 버리고, 즐기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책을 사고 싶어도, 음반을 사고 싶어도, 콘서트, 영화관에 가려해도, 테니스 한번 치려해도, 지갑을 들여다보며 고심해야 하는 삶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에게는 암울하기만 하죠.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은 핸드폰 부품회사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는 클라우디오, 다양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로셀라, 우체국 직원이지만 영화 잡지에 기사를 기고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알레시오, 아직 대학생 신분으로 부모의 용돈으로 유흥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마테오입니다. 아직 사회생활에 진입하지 않은 마테오를 빼고는 모두 천유로 안팎의 월급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는 친구들이죠.

이 책을 쓴 두 명의 저자 역시 천유로 세대에 속하는 30대의 이탈리아 청년들입니다.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는 건축학을 전공한 후 많은 직장을 전전했지만,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월 760유로를 벌고 있고, 경제학을 공부한 알레산드로 리마싸는 9년째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500유로에서 1000유로 사이의 불안정한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쉽게 일자리를 얻었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집을 장만하고 노후를 대비해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부모 세대의 평범한 삶이었다. ...
지금의 25~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은 많은 수가 단기계약이나 프로젝트별 계약 같은 고용 상태로 있으며, 결혼은 물론 인생 설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라는 주장을 하며 블로그에 올려졌던 이 소설은 유럽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와 공감을 불러 일으켜서 이렇게 소설화는 물론 영화화까지 결정되었다고 하네요.


이 책은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문체는 가볍지만 현실적 무거움을 전달하는 소설입니다.

돈 문제에 쪼들려 영악해지는 모습, 외모를 가꾸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헬스장에 드나드는 모습, 어느날 출근길에 평소에는 비싸서 안 사먹던 고급 커피와 브리오쉬를 사 먹으면서, 즉, 자신의 형편보다 조금 사치스런 소비 행위를 하면서 야릇한 뿌듯함과 자신감을 느끼는 모습 등등,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생각들, 감성들이 매우 공감가도록 그려지죠.

하지만, 어느날 배달된 가스 고지서 하나로 네 명의 우정이 위태로와지는 순간을 그린
에피소드를 보면 안타까운 심정에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고,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클라우디오가 길거리에서 만난 노숙자 아주머니가, 적선한 돈을 거절하며 "돈이야 나보다는 젊은이가 더 필요하지. 요즘 젊은 사람들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나도 알아. 하루 열두 시간씩 일 시키고는 그 대가로 몇 푼밖에 안 주면서 6개월 후에 좀더 달라고 하면 해고해 버리기 일쑤니!" 하고 말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젊은이들의 CPE(최초고용계약조항) 반대시위라던가 이탈리아에서 대학 졸업하고 4년 되면 평균 월급이 1,200유로라는 통계를 보면, 젊은이들의 취업 경쟁, 특히 정규직에 대한 치열한 경쟁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노동시장의 경향을 보면 안정적이고, 사회보장 장치를 부여받는 소수의 편한 일자리와 임금이 적고, 보호막이 거의 없으며, 덜 숙련된 노동을 요구하는 불안정한 일자리로 양분화되는 쪽으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전자에 속하기 위해 무한경쟁(아무리 불합리한 입사기준이라도 충족하기 위해)에 매달려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돌아보기 힘든 요즘의 취업세대들에게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야말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반항이 필요한 때가 아닐런지...


2007년 8월 12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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