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어제 오전 정부는 한미 FTA 협정문을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공개된 협정문에는 영문본 뿐 아니라, 전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한글본도 있더군요... 어쨌거나, 그 협정문을 대충 훑어내려가다 보니 양국간 자유 무역에 관한 이런저런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1절을 지나, '투자자와 국가간 분쟁 해결'이라는 내용의 2절이 눈에 확 들어오는군요.

골자는


한국에 투자한 미국의 투자자가 한국에서 직간접으로 손해를 보았을 경우,
투자자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제3의 국제중재기관의 중재 하에서,
당사자, 즉 투자자 개인과 한국 정부가 합의할 수 있도록 함.


이라는 규정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미국정부가 아닌 일개 개인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죠.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문구 그대로만 보아도, 개인과 국가를 동급으로 보고 있네요.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이 아닌 이상, 제 정신에 누가 이런 요구를 수용할까요?

미국은 판례중심의 관습법을 따르는 나라이고, 문서로 규정하지 않는 사항이나 애매한 사항은 귀신같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데 천부적인 나라입니다. 공개된 협정문을 보면, 공공정책도 대부분 예외규정을 두고 있고, 중재 과정에서 판단하도록 하고 있네요.

중재 (Arbitration) 라는 것은 법원의 재판과는 그 성질부터가 다른 것입니다. 중재기관 및 과정과 절차는 분쟁 당사자들이 원하는대로 정하는 것이고, 심판의 진행과 결정은 기밀사항이며, 한번 내려진 결정은 뒤집을 수 없고, 단판승부이며, 그리고 중재인은 금전적 보상을 받습니다. 간단히 말해 중재란, 분쟁 당사자들이 제3자의 유상도움으로 철저히 비공개로 소위 쇼부를 치는 과정인 것이죠. 사적인 차원의 문제해결 방식의 확대라고 보면 됩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 투자자 - 직접 국가소송제 (Investor - State Claim) 란,


한국에 투자한 일개 미국인이 한국정부에 "당신네 정부 또는 누구누구때문에 손해봤으니까 정부인 너희가 대신 배상해..." 하며, 한국정부를 한국의 법 테두리 밖인 국제중재기관으로 끌고 가서, 한국 내의 특수상황이나 공공성을 배제한 채 철저히 투자와 사업논리만 들이대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해주는 정말 XX 같은 중재 제도.


라는 것입니다.

더 골때리는 것은 소송 제기 90일전 소송의도(Notice of Intent) 를 전달하는 것이죠. 그 안에 포함된 황당한 손익계산을 보면 정부에서도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웬만하면, 소송 안 당하려고 투자자에게 많은 권리를 넘겨버릴 수도 있다는 것... 특히 공공의 이익 관련해서 사유재산의 국유화 같은 조치가 불가피할 때, 국내의 공공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거액의 배상금을 그 투자자에게 지불하게 될 수도 있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좋아 우리가 포기하겠어. 하지만 그 피해금액을 배상해..." 이런저런 규제로 못하게 될 사업의 이익까지 모두 추정, 눈덩이처럼 불린 액수를 말이죠. 그리고는 한국에 투자하지 말라고, 투자할 곳이 못 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닙니다. 물론 그 배상금은 모두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충당될 것이구요.

얼마 전에 출간된 <투자자-직접 국가소송제> 라는 책은 이 그지같은 제도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니까,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미국과 FTA 를 맺은 나라들은 모두 이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무슨 국제의무규정도 아니고, 필요하면 택하는 단순히 하나의 옵션일 뿐이죠. 미국은 필요하니까 강력하게 포함을 주장한 것인데, 한국도 이것이 필요했을까요???

호주는 2004년 미국과 FTA 를 체결했죠. (AUSFTA) 그러나, 이 투자자 - 국가 소송제는 FTA 논의 초반부터 지방정부와 국회, 각종 시민단체, 심지어 기업계까지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미국기업이 부당하게 많은 권력을 갖게된다는 것...

2004년 1월 워싱턴 최종협상에서 미국이 강력한 밀어붙임에도 불구하고 호주정부는 "Unacceptable" 로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결국 미국은 후퇴하고, 호주정부는 이 그지같은 제도를 협정문에서 제외시키게 되죠. 다국적 기업이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에는 미국도 이 제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미국내 위기의식도 한 몫 한 것이기도 하지만...

책에서는 투자자 - 국가 소송제를


투자자나 투자기업이 투자대상국가를 자기네들이 영업하기 쉽고, 쉽사리 돈을 벌 수 있도록 정치와 사회를 공격하고, 각종 규제를 느슨하게 만드는 공격용 창 (보호용 방패가 아닌)


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당했죠. 1997년 IMF를 통해 그 악명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감에 따라  경제구조는 순식간에 세계화 종속형으로 바뀌었고, 알다시피 지금은 청년실업 180만인가요... 아무튼 그런 시대가 된겁니다.

***

남미의 가난한 나라 볼리비아도 1999년 IMF 로부터 융자를 받고 나라전체가 구조개혁을 당하게 됩니다. 권고 개혁내용에는 모든 공기업을 매각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구요... 그중에는 코차밤바 지역의 상하수도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IMF 는 이 시설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 돈벌이 기회를 놓칠새라, 미국의 건설기업 벡텔 (Bechtel) 이 단독입찰해서 2만달러라는 헐값에 시설운영권 (아무런 투자가 필요치 않은 무형자산) 을 따내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벡텔이 참여한 국제 컨소시엄 형태를 띤 아구아스 델 투나리 라는 회사입니다.

1주일 후 수돗물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시킵니다. 거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죠. 게다가 사람들이 자기 집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받는 것도 금지하는 법까지 만듭니다.

다음해 마침내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상하수도 사유화를 취소하고, 벡텔에게서 다시 운영권을 환수하라..."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시내전체가 마비되는 사태가 일어나죠. 정부는 시위대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6명이 사망까지 하는 상황이 초래됩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까지 투입을 합니다. 또다시 한 소년이 얼굴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벡텔은 이 대중봉기를 범죄조직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저지른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죠.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구요, 결국 정부는 굴복하고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벡텔은 상하수도 운영권을 빼앗기고, 나라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 사건은 볼리비아 내 유사한 많은 투쟁으로 번져나갑니다. 그만큼 이런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이 사건은 수자원 사유화에 맞서는 환경운동가들에게는 2000년 4월대첩이라는 승리의 대명사라네요.

그런데, 쫓겨난 벡텔이 가만히 당하고 있었을까요? (깡패짓하다 쫓겨나간 주제에...) 미국과 볼리비아는 FTA도 체결하지 않았으니 투자자 - 국가 소송제에 해당되지 않는다구요?

자, 그러면 국제 컨소시엄으로 세워진 아구아스 델 투나리 라는 회사를 봅시다. 소유구조를 보면 볼리비아 회사 4개가 20%, 스페인의 한 회사가 25%, 나머지 55%의 지분을 벡텔의 자회사 IWL 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벡텔은 볼리비아 사태 이전인 1999년 IWL 주식 절반을 한 이탈리아 회사에 매각하죠. 그리고  IWL 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서함으로 근거지가 이전되구요. (소위 유령회사죠.) 볼리비아와 네덜란드가 1992년 맺은 양국투자협정에 포함된 투자자 - 국가 소송제를 악용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옮긴 것이죠.

암스테르담의 사서함이 소유한 아구아스 델 투나리 의 27.5% 지분만큼의 투자협정 보호를 벡텔은 주장했고 ICSID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는 이를 받아 들입니다. 배상요구액은 2,600만 달러... 우리나라 규모로 환산하면 약 4억달러 (4천억) 정도...

원래 비공개로 진행되는 중재이지만, 이 사건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였는지라 전세계 시민들과 환경운동가들의 분노를 샀고, 벡텔은 전세계의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됩니다. 벡텔본사는 엄청난 항의 우편물과 시위대들의 데모, 운동가들의 조사촉구에 시달리게 되구요. 초국적 기업이 저지른 횡포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 이 국제 스캔들의 결말은...

벡텔은 볼리비아 정부로부터 3백원을 받고 그 XX같은 중재신청을 취소하였다고 하네요... 그나마 다행스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

FTA 협정문 1절과 같이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고 사후처리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관심도 덜 하고, FTA 의 큰 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문제가 발생하고 소송이 제기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나라가 받게 되는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상처는 엄청난 것일 수 있습니다.

보통 양자가 계약서를 쓰는 목적은 "뭐뭐를 하자"는 내용을 문서화하는 것 뿐만이 아니죠. 진짜 이유는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어떻게 하자"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도 분쟁의 처리 또는 해결 방식이구요 ...
    
투자자 - 국가 소송제의 중재신청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죠. 이 책에서는 이 외에도 투자자 - 국가 소송제의 수많은 황당한 사례를 통해서 이 제도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꼭 한번 보시기를 바라고, 될 수 있는 한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이 내용을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 홍기빈의 바램이기도 하구요...


2007년 5월 26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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