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감싸 안고 눈물을 흘리며 " 이 바보야..." 했을 때 여기서 "바보"와, 교실에서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 바보야..." 했을 때 여기서의 "바보"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문장은 정확히 동일하다.

같은 TEXT 라도 언제 어디서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뉴스 TEXT 같은 FACT 정보조차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너와 내가 주고 받은 대화의 TEXT 자체는 그 단독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기가 참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TEXT 에 진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위 예에서만 보자면, "눈길 위의 두 남녀"와 "교실에서의 학생과 선생님" 이 된다. 그들이 주고 받은 대화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화가 담고 있는 감정이며, 이것이 그 실체다. 그리고 그 실체는 대화 뒤 배경이 결정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대화 뒤에 어떤 그림이 배경에 걸리냐 하는 거다.

콘텍스트 (CONTEXT) 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보통 문맥 또는 맥락 을 의미한다. 그리고 맥락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그 "뒤에 걸린 배경그림이 보여주는 실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만약에 TEXT 가 피라면, CONTEXT 는 혈관같은 거다. 그러니까 TEXT 가 흘러 다니는 길이 CONTEXT 라는 이야기다. 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TEXT 가 흘러 다니는 길인 CONTEXT 전체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TEXT 의 단면을 보았다고 해서 거기서 진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혈관조차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그저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CONTEXT 라는 것도 내가 사는 이 나라의 언어 시스템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TEXT 를 쏟아 낸들, 그것은 CONTEXT 를 따라 흐르게 되어 있을 뿐이다.

TEXT 는 공용이지만, CONTEXT 는 일인용으로 한사람에 하나씩 부여된다. 가령, 내 삶의 기록을 TEXT 로 남겼다고 하자. 그리고 다른 누군가 내 TEXT 를 읽었다고 하자. 생성되는 의미는 하나가 아니라 두가지다. (TEXT + 나의 CONTEXT) 가 하나, (TEXT + 타인의 CONTEXT) 가 하나... 이 둘은 다른 거다.

언어를 소통의 수단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도 그렇지 않다. 우리라는 삶과 존재 뒤에 정말 크게 걸려 있는 배경 그림이 바로 이 수많은 CONTEXT 라는 혈관이 얽혀져 구축된 언어의 거대 스트럭처 (STRUCTURE) 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거대한 구조물에 편입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거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TEXT 는 만들어 낼 수 있지만 CONTEXT 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생성해 내는 TEXT 는 실은 STRUCTURE 의 CONTEXT 를 따라 흐르게 되어 있을 뿐이다. 운명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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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 C 세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그림, 그러니까 CONTEXT 를 (아니면 FRAME,  또는 STRUCTURE 라고 해도 좋다.) 각각 (1), (2), (3) 이라고 하자.



A : 이 영화는 정말 왜 이 모양이야 + 영화감독의 CONTEXT  =  작가정신이 없다.
B : 맞어 이 영화 정말 왜 이 모양이지 + 의류 디자이너의 CONTEXT  =  의상이 후지다.
C : 글쎄 난 재미있기만 하던데 + 증권회사 부장의 CONTEXT  =  돈 많이 벌었다.

자, 이제 A 와 B 가 대화를 나눈다. TEXT 가 동일하다.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는 A 의 TEXT 가 (2) 와 작용하고, B 의 TEXT 가 (1) 과 작용함을 의미한다. TEXT 는 같아서 A 와 B 가 의견 일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정신의 부재와 의상 스타일의 구림이 부딪히고 있을 뿐이다.

B 와 C 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B 의 TEXT 가 (3) 과 작용하고, C 의 TEXT 가 (2) 와 작용한다. 이 경우는 TEXT 도 다르고, TEXT 와 CONTEXT  는 사실 거의 만나지도 않는다.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만약에 A 가 미국인이고, B 가 한국인이라고 가정하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이건 한국어이건 상관없다. 어떤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가? 더구나 A 와 B 의 대화 뒤에 걸린 배경그림까지 고려를 한다면... 어떤 의미가 발생하는 TEXT 와 CONTEXT 의 작용이 있을 것 같은가? 다른 나라 언어의 CONTEXT 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영어를 시작할 때 그 관심의 대상이 TEXT 냐 CONTEXT 까지냐를 분명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만약 TEXT 까지라면 서바이벌 영어 플러스 정도면 될 지도 모른다.  난 서바이벌 + 약간의 비즈니스 영어 정도면 일상의 대화는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의 CONTEXT 까지 알아야 겠다 싶은 경우에는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언어 자체를 익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2008년 3월 14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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