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실은 그것이 디스토피아의 야누스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마이크 레스닉의 SF소설 <키리냐가>에서 우리를 가장 마음 심난하게 하는 두 주인공은 카마리와 은데미라는 10대 여자와 남자 아이다. 이 소녀와 소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다 보면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무엇인가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한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라고 불리우는 에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에 나오는 나오는 구절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낙원에서 가능한 선택은 두가지밖에 없어. 자유가 없는 행복이냐, 행복이 없는 자유냐...",  "인간의 자유가 0 이라면 인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자유가 0 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또 인간의 자유가 100 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도대체 낙원은 무엇이며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영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키리냐가>도 아마 그 일부에 해당할 것이다. 전통에 근거하여 키리냐가를 유토피아로 만들고 싶었던 지도자 코리바가 낙원을 만들기 위해 자유가 없는 행복을 선택한 것이라면 그 낙원 안에서 카마리와 은데미는 행복없는 자유를 꿈꾼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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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세대가 자유없는 행복을 젊은 세대는 행복없는 자유를 택하는 것이 만약에 "상식"이라면, 낙원에서도 세대간 충돌은 원래부터 불가피하다라는 말이다. 통치자가 전체의 행복을 피통치자는 개인의 자유를 선택하는 것도 "상식"이라면, 그 사이에서도 역시 충돌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충돌이 발생했다"가 아니라 "완충지대는 있느냐"이며 "범퍼역할을 누가 담당하느냐"다. 난 그래서 어른 말씀 잘 듣는 아이들이 가장 안쓰럽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발생하는 충돌을 잘 관리하고 조절해 달라고 지도자를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키리냐가에서는 코리바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코리바는 유토피아의 근거로써 전통과 전체의 행복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것은 개인, 특히 젊은이들의 자유와 진보라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면서 유토피아의 정의는 점점 흔들린다. 어른 세대의 유토피아와 젊은 세대의 유토피아로 같은 곳을 쳐다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착각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정부나 국회가 필요한 이유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된다. 그곳은 가령 어른 세대의 행복지수를 얼마, 젊은 세대의 자유지수를 얼마로 가져 갈 것인가에 관한 공론의 장이어야 한다는 거다. 어쨌건 그 정부와 국회의 존재 자체가 이미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긴 하지만, 그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지수의 문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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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그 곳에 개인의 자유를 대변하는 사람과 전체의 행복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열띤 토론은 없는 듯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돈을 행복의 정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꿰차고 앉았다. 그것도 노동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사람은 놀고 있어도 돈이 벌어들이는 그런 돈 말이다.

얼마 전 정부와 국회는 자기네는 행복과 자유의 균형점을 평균 30억으로 설정하였다고 실토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국민의 대다수가 "행복없는 자유" 외에는 선택권이 없어진거다. 왜냐하면, 정부와 국회의 관점이 "30억 가진 사람의 관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30억 세대가 노는 세계는 88만원 세대가 노는 세계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거다. 각각의 유토피아가 다르고 고민이 다르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30억 세대에게는 88만원 세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30억 세대에게 88만원 세대의 문제에 관해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그들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른다.

아래 그림에서 가로축은 돈이고 세로축은 지수이다. 중심을 얼마로 두느냐에 따라 그려지는 곡선은 제각각이다. 따라서 중심이 3천만원이냐, 30억이냐에 따라 그 국민의 체감 자유지수와 행복지수가 요동을 친다. 정부와 국회는 30억으로 설정했고, 아마 그 기준에 맞는 정책을 펼 것이다. 그러니까 세로축을 아주 오른쪽으로 달라 붙게 그렸다는 거다.


사실 최고의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쌍방에게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세요 하는 것인데, 중심점도 한참 오른쪽으로 쏠려있는 데다가 MB 본인 스스로도 거기서도 한참 오른쪽에 놓여 있으니 경쟁자가 아닌 견제자가 없다. 그래서 MB 는 "나의 경쟁자는 없다" 라는  해괴망측한 소리를 지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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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에 사는 사람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자유 0 이면 행복 100 이고, 자유 100 이면 행복 0 인 곳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만약에 행복이라는 것이 자유의 제한이라는 조치에 대한 댓가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 지도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할까? 적어도 이러한 물음에 관해 고민을 해 본 사람만이 지도자라는 위치에 올라서야 한다. MB 는 그렇게 자유 자유 하더니 99% 의 자유를 뺐어다가 1% 끼리 나눠 쓰고 , 1% 의 행복은 99% 가 나눠 쓰게 했다.

때로는 그 자리에 오른 어떤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자유없는 행복을 추구하기도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1그램의 행복을 위해 남의 자유 1톤을 제한하기도 한다는 거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식인과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언론인조차도 자신의 가벼운 행복을 위해서 역시 남의 무거운 자유를 제한하곤 한다.

부단히 자유와 행복의 모순을 지적하고 또 행복에 가려진 자유를 일깨워야 하는 것이 지식인과 언론인이 몫임에도, "어른 말씀 잘 들어라" 하며 자유보다는 안정과 행복을 강조하는 무리를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할 일은 "행복없는 자유" 의 근원을 파헤치고, 혹시 어른 세대의 자유에 젊은 세대가 행복을 빼앗긴 것은 아닌지, 또는 지금의 1%의 자유가 99%의 행복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낱낱이 까발려야 하는 거다. 작게는 세대간부터 시작해서, 계층별, 국가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거듭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방송 및 언론사들은 글로벌 뉴스를 너무 안 보여 준다. 그래 놓고 세계화나 영어는 왜 그렇게 떠드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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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농협 하나로 마트에 가서 사과를 샀다. 사과를 한아름 들고 계산대에 갔는데 평소에 보던 아주머니들은 다 어디로 가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유니폼을 입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어...

심지어 할아버지들이 하던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서 카트를 밀어주는 일조차도 20대들이 하고 있다. 어어 이런...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어디로 가고 이 20대들은 여기서 왜 그 일을 하고 있을까? 마음이 참 착잡하다. 개개의 전후사정을 알 수는 없겠지만, 다른 일은 없었을까? 이런 일은 그 앞에 놓여진 길이 뻔히 보이는 건데... 주유소 아르바이트보다야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손에 쥐게 될 만원짜리 88장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1만원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금액일까? 30억 세대에게 1만원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금액일까?

20대는 "자유없는 행복"을 지향한다? <우리들>에서 묘사된 것 같이 인간의 상상과 영혼을 몸서리쳐지는 바이러스 세균 쯤으로 취급하고, 마치 머리는 수천개이지만 몸은 하나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개성이라는 것도 사라져 버리고,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되는 그런 부류의 인간 대열에 끼고 싶어 한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나 월급으로 만원짜리 88 장을 손에 쥐고서는 애당초 자유없는 행복도 행복없는 자유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위의 그림에서 보자면 거의 왼쪽 끝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먹고 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을 수 밖에 없는데 지금 세상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알게 뭐냐... 사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어쩌면 완벽한 디스토피아가 되는 셈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유지수도 제로고 행복지수도 제로...


2008년 5월 1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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