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타 연주 10곡은 뭐요" 라고 묻는다면, "꼭 포함시켜야지" 하는 곡들이 몇 곡 있는데, 그 중에는 영국의 아트락 밴드 Babe Ruth 의 <Black Dog> 이라는 곡이 포함된다. 참고로 Led Zeppelin 네번째 앨범의 포문을 여는 그 <Black Dog> 과는 물론 전혀 관련이 없다.




Babe Ruth 의 <Black Dog>은 <The Mexican> 으로 유명한 1972년 데뷔 앨범 <First Base> 에 4번째로 수록된 곡으로, 한시라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중심에 서서 곡 전체를 끌어가는 기타 톤과 백킹 리프들과 격정의 솔로 라인, 그리고 여성 보컬의 파워가 쉬지 않고 듣는 이의 감정을 몰아부치는 그런 곡이다. 뭐랄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러니까 베이브 루스가 생애 처음 홈런을 친 후 1루를 돌며 느끼는 그런 감정...


하여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음악은 아니고 그 앨범 커버에 관한 것인데, 이 앨범을 처음 접하면 마치 우주인들이 수중에서 상어를 타고 야구를 하는 것 같은 요상한 커버의 그림이 눈에 먼저 들어 온다. 뭐랄까 약간 독특한 우주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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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버는 로저 딘 (Roger Dean) 이라는 영국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영국 프로그레시브락을 대표하는 예스 (Yes) 의 음반들을 가지고 있다면 알겠지만, 그는 Yes 의 그 수많은 앨범 커버에 그려져 있는 그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미지의 세계를 묘사한 것 같은 바로 그 이미지들의 창조자다.




Yes, Budgie, Greenslade, Asia, Uriah Heep, Yes 멤버들의 솔로 앨범들, 그 외에도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락 음반들의 커버를 통해 그의 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뭐랄까, 로저 딘의 이미지가 프로그레시브 락 사운드가 추구하는 세계관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기술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으면서도 초현실적인 철학을 담아 내려는 음악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쨌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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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로저 딘의 작품을 좀더 자세히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지금 경복궁 옆 대림 미술관에서는 <Dragon's Dream: Roger Dean Retrospective> 라는 타이틀로 '로저 딘 회고전'이 진행 중인데, 기간은 3월 25일부터 시작해서 6월 6일까지이고, 보니까 3월 말에는 로저 딘과 함께 하는 이벤트도 있었던 모양이다.


미술관 3 개의 층에 걸쳐 로저 딘의 작품들이 '원화 & LP 커버' 방식으로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고 우주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같은, 성시완의 설명대로 초현실적인 판타지 작품처럼 보이지만 리얼리티의 요소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현대판 수묵화를 보는 듯한 동양화 느낌도 많이 나면서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난 앤디 워홀의 팝 아트 따위보다는 이것에 끌린다.

그의 작품들이 그려져 있는 LP 몇 개를 그저 클립 하나로 벽에 고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집은 훌륭한 갤러리가 될 수 있다. 전시회를 돌면서 "왜 이런 LP 들을 좀더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할까" 내내 후회가 들기도 했고. 지금 집에 이사오면서 커버가 멋진 LP 10 개 정도를 액자로 만들어 나름 벽을 장식하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틈이 나면 로저 딘의 작품이 그려져 있는 LP 들을 수집해야겠구나 싶기도 하다.

또한 '음악 + 그림 + 글' 그러니까 토탈 예술 작품으로서 음반이라는 것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LP 가 지금 그러하듯이 어차피 수집과 소장의 대상으로 음반 시장이 변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번 해볼만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여간 40년 전에는 이렇게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의 음반이라는 것을 만들었던 거다. CD 커버는 작품을 담기에는 너무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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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에서 있었던 재즈 공연을 뒤로 하고 3층을 돌고 내려와 2층에서 조우한 Yes 의 <Relayer> 원화를 보는 순간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은 음반이지만 Yes 의 작품 중에서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Relayer> 이기도 한데 이것을 아주 커다란 원화로 접하니 내 머리 속에서는 <Sound Chaser> 의 파동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느낌이다.


로저 딘 자신이 그가 그렸던 앨범 커버 중에서 최고로 꼽는다고 한다. 거대한 고딕 양식의 동굴 바위에 두 마리 뱀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고 오른쪽 비탈길에서 무장한 승려들이 백마를 타고 내려오고 있는 그림이다. 포스터라도 한 장 구입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울러 그 맞은 편 벽에는 Yes 의 멤버들인 Jon Anderson, Bill Bruford, Rick Wakeman, Steve Howe 가 Yes 가 아닌 별도의 프로젝트 음반으로 발표한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의 원화가 걸려 있는데, CD 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던 그 환상의 세계를 이렇게 아주 커다란 원화로 접하고 나니 왜인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바타>를 봐야겠다라는 생각도 들고.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앨범 커버에 대단한 점수를 주고 싶은 Uriah Heep 의 <Magician's Birthday> 도 단연 손꼽고 싶은 명작이다. 난 이 음반을 매우 좋아한다. 로저 딘은 발매일에 쫓기다가 단 하루만에 그것도 시간이 너무 없어 한차례 교정도 없이 발표했는데 그것이 불후의 걸작이 된 것.



이 그림을 찍다가 들켜 촬영은 더 이상 하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이 외에도 눈과 뇌를 자극할 아주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Babe Ruth 의 <First Base> 도 물론 있다. 프로그레시브 락 팬인데 놓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전시회이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혹 영화 <아바타>에 묘사된 세계에 매료가 되었다면 역시 꼭 볼 만한 전시회다. 물론 저렴하다. 미술관에서 제작한 도록은 가격은 좀 센 대신 꽤 쓸만하니 구입해도 나쁘지 않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가 이 로저 딘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들을 심각하게 도용했다는 이야기도 접한 바 있는데 이 전시회를 다녀 와서 보니 갑자기 <아바타>가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도대체 얼마나 베꼈길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위는 영국에서 출간된 판매용 도록이며, 아래는 미술관 제작 도록임)


2010년 4월 11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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