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여섯 개 지구를 배경으로 한, 여섯 명의 감독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영화 <내가 본 파리> (Paris vu par...)는 <사랑해, 파리>의 60년대 버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훨씬 더 우아하고 유머가 넘친다고나 할까...

몇달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했던 에릭 로메르 회고전에 가서 봤었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많았다. 하긴,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의 팬이라면, 여섯 명의 명감독이 선사하는 이 선물 세트에 욕심을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때론 마치 파리 시 홍보 프로그램처럼 각 지역을 설명하는 중년 남성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개성있는 스토리로 15분여의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개선문과 북역, 카페 드 플로르 근처 외에는 지역적 특색이 그리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어느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더라도 파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파리만의 매력이 아닐까. 감독의 개성에 따라 달라지는 서로 다른 시각의 카메라들은 60년대 파리의 느낌을 길거리 소음과 행인들의 모습까지 여과없이 전달해 주고 있다.


 


 Jean Douchet
Saint-Germain-des-Prés 을 배경으로 하룻밤을 지내고 난 남녀의 동상이몽을 보여주면서, 미국 여인의 실망감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리얼한 연기와 생생한 거리 묘사가 인상적이다.

 


 Jean Rouch
영 화 감독 바벳 슈로더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Gare du Nord 의 에피소드. 오래된 연인(남편?)에게 권태감을 호소하며 말다툼을 한 여인에게 매력적인 남성이 나타나 일탈을 제안하는 이 짧은 이야기는 롱테이크 기법을 흥미롭게 사용하였다. 흔한 소재를 가지고 꽤 공감가는 이야기를 그려내다가 마지막에 놀라움을 주는 에피소드였다.

 


 Jean-Daniel Pollet
Rue Saint-Denis 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경쾌한 이야기인데, 놀랍게도 창녀와 그녀의 고객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인생의 연륜이 쌓인 듯한 창녀와 얌전한 남성이 빚어내는 이 이야기는 주도권이 뒤바뀐 코믹한 설정을 이용하여 자연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낸다. Jean-Daniel Pollet 의 다른 작품들을 보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다.

 


 Eric Rohmer
이 전에 접했던 Eric Rohmer 작품들과는 또다른 유머 감각을 선사하는 Place de l'Étoile 에피소드의 핵심은 소심하게 생긴 주인공 아저씨의 연기가 아닌가 싶다. 우산을 들고 복잡한 개선문 앞을 지나다니는 와이셔츠 가게 직원에게 일어난 출퇴근 길에서의 해프닝과 그를 옭아 매는 작은 미스테리가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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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an-Luc Godard
Jean-Luc Godard 의 Montparnasse-Levallois 에피소드는 상당히 고다르스러운 소재와 표현으로 인해 다소 진부하고 예측가능한 이야기였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캐나다 여인의 연애담을 그렸다.

 


 Claude Chabrol
극 중 아버지 역할로 직접 출연한 Claude Chabrol 감독은 La Muette 에피소드에서 영화 전체에서 가장 심각한 내용을 그려낸다. 한 부르주아 가정의 속물적인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에는 부모간의 끊임없는 말싸움에 질려 몰래 귀마개를 사용하기 시작한 소년이 등장한다.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허한 울림이 섬찟함으로 남는다.


여섯 감독들의 빛나는 이 소품들은 프랑스 영화를 사랑하는, 그리고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딱 맞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지금 봐도 그 멋이 살아있는, 마치 오래된 와인처럼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2007년 12월 31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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