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영화

OLD POSTS/그외 2014. 1. 29. 10:23


요즘 VHS 를 하드 디스크로 옮기고 있다. DVD 로 출시되지 않았거나 구하기가 너무 까다로운  영화들 또는 오래된 TV 프로그램 녹화분들 중에서 버리기 아까운 것들인데, 하다보니 그 중에 <EBS 영화사 100년, 100대 영화> 라는 것도 있다. 이 방송은 미국영화연구소 (American Film Institute, AFI) 에서 제작한 <AFI's 100 Years...100 Movies> 라는 다큐멘타리를 1998년 미국 CBS에서 방영한 것이었는데, 2001년 12월에 EBS 에서도 국내성우 더빙판 10 부작으로 방영한 거다. 방송은 위대한 영웅, 느와르, 가족, 도전, 미친 사랑, 전쟁, 위대한 사랑, 일그러진 영웅, 스릴러, 판타지와 SF, 이렇게 10개의 테마 분류로 10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AFI's 100 Years...100 Movies> 는 미국 영화계에 종사하는 약 1,500명의 사람들이 영화의 탄생년도라고 알려진 1895년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100대 영화" 라는 것을 뽑아 유명 배우, 감독, 제작자 등의 인터뷰와 영화의 명장면을 설명한 것을 편집한 것인데, 작년 2007년에는 10년 만에 새롭게 리스트를 업데이트하여 CBS 에서 다시 방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8년과 2007년 영화 리스트와 그 변화는 여기를 참조하시기를... (가입이 필요함)

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1950~70년대 영화들이 참 많다. 거의 절반이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가장 최근인 90년대 이후인데, 2007년 판에서도 보면 약 10편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8위의 <쉰들러 리스트>와 2007년 50위로 새롭게 포함된 <반지의 제왕 1편>과 98년 98위에서 07년 68위로 오른 <용서받지 못한자>를 제외하면 70위권 내에 들어가는 90년대 이후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영화를 선정한 사람들의 기준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왜 이렇게 오래된 영화의 손들을 들어주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1941년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은 여전히 부동의 1위일까? 100년이 지나 2095년이 되었을 때, 그때도 AFI 는 <시민 케인>을 여전히 1위로 뽑을까?

입 떡벌어지는 스펙타클에 주위를 휘감아도는 빵빵한 사운드... 영화를 만드는 테크널러지는 분명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지금이 훨씬 뛰어나고, 제작 환경도 지금이 더 풍족하고 자유로우며, DVD 나 HD + 5.1 사운드 시스템같이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도 너무 좋아졌고, 영화의 유통환경도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다양해졌다. 따라서 환경의 변화만 보면 100대 영화는 모두 최근 10년 동안 나와야 하는 것이 정상이어야 할 것 같은데도 보면 그게 아니다. 유일성이나 희귀성에 기반하는 예술과는 이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가령, 다비드상은 덜렁 그거 하나니까 희귀해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해도, 영화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옛것을 얼마든지 100위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데도, 그것이 지금 어렵다는 거다.

90인치 스크린에 HD 프로젝터로 피터잭슨 킹콩 HD-DVD 를 보고 난 다음에 킹콩 DVD 는 그렇게 후져 보일 수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다른가? 영화보는 맛이 확 사네... 역시 테크널러지의 진보는 좋은 거구나... 그런데, 신기한 것이 저 2007년 100대 영화 41위에도 랭크된 1933년 킹콩도 결코 재미가 덜 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토리는 거의 동일하지만 화면과 사운드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그 스케일은 비교도 안된다. 그럼에도, 1933년 오리지날이 결코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영화 자체는 1933년 판이 더 귀엽다. 그리고 나에게 굳이 하나를 택하라면 나도 1933년의 그 흑백 버전의 손을 들어줄 것 같은데, 왜일까? 단지 오리지날이라는 이유로? 그건 아닌 것 같고...

며칠 전에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 VHS 를 하드디스크에 백업하고 그것을 다시 DVD 로 구워서 보았다. (이 작품은 내가 아는 한 아직 DVD 로 나온 바 없다.) VHS 가 이렇게까지 조악한 화질이었나? DVD 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이 이런 영화는 VHS 화질로 보았다고 해서 그 여운과 감동이 반감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거다. <집시의 시간>을 만약에 지금 찍어서 블루 레이로 출시한다 하더라도 25년 전 VHS 로 나온 것과 뭐가 다를 게 있을까? 화질이 좀 후지다는 거 외에...

이쯤 되면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을 대충 눈치챘겠지만, 걸작이 걸작인 이유인즉슨, 그것의 재미와 가치가 지금의 풍요로운 제작환경과 엄청난 테크널러지가 붙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어떤 상상력과 철학을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있어 지금의 테크널러지는 그야말로 잉여 기술일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적어도 인간이 인식하는 유머와 감동은 이미 예전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꼭 지금의 휘황찬란한 테크널러지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난 디워보다 김기덕 감독의 40년 전 Yongary 를 더 재미있게 봤다.)

히치콕은 그 옛날 이미 구식 크레인으로 분석하는 심리묘사와 보여줄 수 있는 쇼트는 다 보여주었고, 스필버그도 <쥬라기 공원>의 그 CG 기술과 자기 장기의 촬영기법 다 버리고, 핸드헬드로 들고 뛰어 다니면서 찍은 <쉰들러 리스트>로 90년대 영화 중에서는 유일하게 50위 안에 랭크되었다. (가장 상업적인 영화를 찍는 미국에서도 이런데 유럽은 오죽할까?) 도대체 테크널러지는 영화에서 뭐 더할 게 남았지? 블럭버스터도 이제는 들고 뛰어 다니는 영화들이 많아지고 있다.

전세계 영화계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 심각한 부족란을 겪고 있는 것은 상상력이지 기술은 아니다. 담을 그릇은 점점 커지는데 담을 내용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지금의 큰 그릇은 상대적으로 비어 보인다. 세월이 흘러 테크널러지가 발전해, VHS - DVD - Blu Ray 가 되도, 사람은 사람 - 사람 - 사람 ... 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이전 세대가 3단계의 테크널러지까지 올라왔다면, 이후 세대는 3단계의 테크널러지부터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면 다시 바닥에서 시작해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것들을 하기야 하겠지만, 조금만 잘 들여다 보면 결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테크널러지는 일차함수 일직선으로 상승하며 진보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개인 차원에서 보면 항상 절대값 사인함수 모양으로 진보한다. 그러니까 세대가 시작하면 모든 사람은 늘 영점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개개인 입장에서 보면 인류의 누적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으니까... 이건 역사가 되풀이되는 이유이기도 할거다.

그렇게 수많은 책이 쏟아져도 여전히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꼭 걸작 목록에 포함시키고 있고, 아직도 음악가들 스스로도 베토벤을 능가하는 음악가를 찾치 못하고 있다. 위대한 작품은 꼭 옛날 것이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걸작은 뽑으라면 여전히 옛날 것을 많이 뽑는다. 신세대이건 구세대이건... 글쎄, 한 백년 더 지나면 또 달라질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그렇다.

음악은 원래가 현장에서 체험한 순간적인 감동의 경험을 추억하는 거였는데, 녹음기술로 인해 하나의 Product 가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물건이 되어 버렸다. 즉, 추억의 가치는 사라져 버렸고, 그 Product 는 음악을 산업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 물건에 담길 무형의 음악 창조는 여전히 인간의 상상력 외에는 답이 없다. 프로툴즈가 아무리 대중화되고, 컴퓨터 음악으로 누구나 뮤지션이 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테크널러지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감성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거다.

영화나 음악, 문학은 제작 환경의 변화가 아무리 풍요로와져도 여전히 사람들의 삶과 철학과 상상력에 기댈 수 밖에 없고, 경험에 기반한 상상력이라는 것은 제한된 상황에서 보다 더 풍요로와진다라는,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테크널러지는 결코 영화를 진보시켰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는 영화를 예술의 한 장르로 만들기 위해, 철학과 역사와 미학을 이미지와 결합시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야말로 영화를 진보시킨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영화연구소가 뽑은 결과에도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는데 유럽은 더 할 거다.) 100년 전이건 100년 후이건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늘 같았다. 다른 건 그것을 담는 그릇, 즉 테크널러지일 뿐이지... 인간의 진보는 모순을 깨나가는 식으로 진행된다면, 테크널러지의 진보란 한계를 깨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서로의 방향이 같은 쪽은 아닌 듯 하다. 영화의 진보 방향은 인간의 방향과 같은 쪽일수도 있다.


2008년 1월 29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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