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잃고 외양간 고친다>, 이 말은 정말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친 사람에게는 그저 하나의 속담 수준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 되는 거고, 이 사람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법이야> 라고 하면, 그건 자신이 겪은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면에, 소를 잃고 고쳐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들어서 아는 그저 하나의 속담일 것이고, 이 사람이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법이지>라고 하면, 그건 그냥 남의 이야기를 종알종알 떠든 것이 된다.

그러니까,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의 참뜻을 깨우치고 싶다면, 정말 소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외양간을 고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깨우침은 책에서 읽는다거나 누가 알려준다거나 해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외양간 고친 사람의 이야기이지, 고쳐 본 적도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아마 들어서 깨우칠 수 있는 거라면, 세상은 온통 예수와 부처로 넘쳐났을 거다...

그런데, 더 명심할 것은 세상은 정말 이런 깨우침의 각개전투 논리로만 풀 수 있는 것들 투성이라는 거다. 그리고 정말 닭살돋는 깨우침의 전투과정 없이는 도저히 그 세계를 알 수 없는, 음악, 영화, 문학, 예술 같은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창조물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 사람들은 깨우침의 과정을 너무 쉽게 본다. 그리고 모르면서 떠드는 사람들 투성이다.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평론가들이 특히 그렇고, 감독, 작가, 그리고 현장의 뮤지션조차도 그렇다. 그리고 이들은 함부로 떠든다. 이런 사람들 말은 들어서도 읽어서도 안된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치열한 깨우침의 전투를 반드시 실제로 겪은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우리는 명작, 명화, 명곡, 명연 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도 그 전투에 참여해야만 그 세계를 알 수 있다고 계속 설득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작품들은 정말 몇개 안된다. 그나마 요즘은 나오지도 않는다. 새로운 책을 많이 읽거나 영화를 많이 보거나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고전에서 참다운 발견을 깨우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다 있는거다.


리들리 스콧은 헐리우드로 날아와서 처음으로 만든 1979년 무시무시한 SF 걸작 <Alien> 이후, 필립 케이 딕의 1968년 소설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1982년 작인 <Blade Runner>가 그것이고, 이것은 영화사상 SF 명작 중의 명작이 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등장인물 중에서, 블레이드 런너인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쫓아다니며 가끔씩 출연해 종이접기를 하는 한 늙은 형사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처절한 싸움을 끝낸 데커드를 뒤로 한채, 이 형사가 다시 등장해 유니콘을 접는다. <이 형사는 왜 나오고, 종이접기는 또 왜 하는 것이며, 감독은 이 장면을 왜 넣었을까?> 궁금해 하는 것으로부터 이 영화보기는 시작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레플리컨트와 인간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라는 거다. 레플리컨트들에게는 가짜 기억이 이식되므로, 테스트를 통해 그 기억이 이식된 것임을 증명하게 되면, 인간이 아니라는 판단 아래, 좋은 말로 Retire, 그러니까 블레이드 런너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판을 보면, 영화 중반 즈음에 데커드가 유니콘이 달려가는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온다. 즉, 그 늙은 형사의 마지막 종이접기는 그가 데커드의 기억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까 진짜 블레이드 런너는 그 늙은 형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거다.

극장판에서는 해리슨 포드가 유니콘을 꿈꾸는 장면을 삭제해서, 인간인듯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즉, 제작자는 인간 대 레플리컨트의 싸움으로 만들어, 헐리우드 상업영화 정서에 부합하도록 한거다.


이제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보자. 이제 해리슨 포드가 꿈꾸는 그 유니콘 장면과 마지막 종이를 접는 형사의 장면은 겹쳐지게 된다. 데커드가 인간이 아니라 레플리컨트? 그렇다면 이제 영화는 완전히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데커드가 인간의 진짜 감정, 판단, 사고가 아니라, 이식된 것에 의해 행동한다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영화의 열쇠라고 한 가짜기억 테스트를 행한 데커드의 판단기준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이제, 이미 봤던 영화의 장면들이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둘 무서운 새로운 장면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리고 이 영화는 한번 볼 때마다 섬뜩하고 무서운 장면이 하나씩 늘어나게 된다. 이 영화에는 이런 장면들이 굉장히 많으며, 이걸 책으로 풀어내면 웬만한 철학서적 한권 나온다고 한다.

아무 영화, 아무 장면을 명작과 명장면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사고하게 하고, 장면을 되새김질 하게 하고, 깨우침에 관한 욕구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면, 그건 명작도 아니고 명장면도 아니고, 그리고 영화도 아니다.

인간을 사고하게 만드는 이런 명작과 명장면을 거부하는 것은, 그러니까 고전의 깨우침을 거부하는 것은 <나는 기억을 이식받은 레플리컨트다>라고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도 중고딩 시절, 엉터리 기억을 이식받아 왔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요즘 깨닫고 있는 중인데, 지금까지의 나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라 이게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니까, 나는 블레이드 런너의 제거 대상이 되는 셈일 수도 있다.

2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블레이드 러너> 근처라도 가는 SF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외양간을 고치고 있는 중인데, 이게 좀처럼 완성되지를 않고 있다. 소를 잃어버린 단계, 즉 그 강했던 엉터리 기억의 이식 과정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2007년 10월 29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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