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모 영화 주간지에는 58회 베를린 영화제 경쟁작을 알려주는 기사가 짤막하게 나왔다. 그런데, 그 영화 제목들 중, 에릭 종카의 <드림라이프 오브 엔젤스>가 끼어 있어 고개가 좀 갸우뚱... -_-; 이 영화가 왜 여기에 끼어 있을까? 이 영화는 1998년에 나온 프랑스 영화인데....

그래서 사이트를 확인해보니, 원래 기사에 포함되어야 했던 것은 에릭 종카의 신작 <줄리아>였고, <드림라이프 오브 엔젤스>는 아마도 그 감독의 대표작으로 표기된 것을 기자가 착각한 듯 싶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도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으로 1999년 개봉해서 약 5천여명이 봤다고 하고, 그해 깐느영화제 공식 경쟁작에 올랐고, 주연 두명은 깐느 여우주연상까지 공동수상했으며, 정재은 감독의 2001년작 <고양이를 부탁해>의 모델이 되기까지 한 영화이기도 하다.감독이 배우들에게 이 영화 보라고 했다니까. <아멜리에>로 국내에서도 알려진 얀 티에르센의 그 엔딩의 그 유일한 음악이 정말 빛을 발하는 영화이며,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영화 중 하나다.

별거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건 어쩌면 별거 일수도 있는 문제다.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은 약 10년 전, 그러니까 비교적 애매하게 오래된 프랑스 영화다.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자.


  1. 영화광이 두명 있는데, A군은 1970년생이고, B군은 1980년생이라고 하고,
  2. A군은 이 영화를 봤고, B군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할 때,


A군과 B군은 각각 어떤 영화잡지를 사서 쭉 보는데, 그 감독이 오랜만에 발표한 신작 뉴스를 접했을때, A군과 B군은 이 신작 뉴스를 보며 각각 무슨 생각을 할까? 물론 B군에게 있어서는 데뷔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어쨌건, 이 영화가 한 마이너 극장에서 개봉을 했고, A군과 B군은 둘다 이 영화를 보았다. 둘다 블로그를 운영하는터라, 집에 와서 저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는데... 자, A군과 B군의 블로그에는 그 영화에 대해 각각 어떤 이야기가 올라올까? 여러분은 A군과 B군의 이야기 중 어느 것을 더 신뢰할 것 같으신지... 적어도 둘다 비슷한 수준의 글을 쓰고, 비슷한 관점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할때...

이건 또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되는거다.

리들리 스콧의 <Alien>,<Blade Runner>,<Black Rain>,<Thelma & Louise>,<1492>,<Gladiator>, <Black Hawk Down>,<Matchstick Men>,<Kingdom of Heaven>, 그리고 <American Gangster>까지 차례로 그의 30년 동안의 영화를 그 동시대에 보아왔던 사람이 말하는 리들리 스콧 이야기와 이제 <American Gangster>를 그의 영화로는 처음으로 본 사람이 말하는 리들리 스콧 이야기 중에서, 여러분은 누구의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간단한 예로, <Sex and the City>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에피소드 몇개 보고 "그냥 그런 섹스 이야기만 반복되네" 라고 말하는 사람과 전편을 차례로 쭉 보고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4가지 성격을 지닌 여성들의 좌충우돌 삶의 이야기네" 라고 하는 사람의 말 중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고 보는지...

테크널러지와 산업의 발전 속도에 따라 그 경험의 기반이 전혀 다른 이 두 사람의 이야기... 그동안의 영화에 담긴 그 시대의 반영상을 직간접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굉장히 어려운 촬영이었을 장면을 지금의 테크널러지로 평가해도 되나?

암울한 냉전이데올로기의 군사정권 시대에 영화를 경험하기 위해 투쟁적이어야 했던 영화광들과 자본의 지배를 받는 시대에 태어나 돈만 있으면 넘쳐나게 영화를 경험하고 있는 영화광들이 저마다 영화史를 이야기할 때 여러분은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런데 지금의 우리나라가 돈만 있으면 영화 맘껏 볼 수 있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가령, 영화가 예술이냐 산업이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할 때, 일단 이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할 일은 뤼미에르 시대부터 차례로 미국, 유럽 및 아프리카, 아시아 영화들의 발자취를 밟아 따라 가면서,  각 대륙의 역사를 읽고, 그 시대의 정치와 경제, 사상, 철학, 문화사적 흐름을 읽고,그 다음에 현재의 관점과 기준으로 산업인지 예술인지 평가할 때만이 비로소 말이 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거다.

지금 이 말은 영화를 보면서 체득하라는 것이지 책을 통해서 그 지식을 습득하라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화에는 그 시대, 그 나라의 진보 또는 후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고,  결국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 그 시대, 그 나라의 상황과 수준을 간접 경험하고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디워에도 2017년에 바라볼 2007년의 한국 CG 수준의 지표가 들어가 있다는 거다. 물론 디워의 흥행기록에는 2007년의 한국 영화 관객 및 미디어 수준의 지표도 들어가 있다.

어떤 분야에서 논문을 쓸 때는, 마지막에 그 참고문헌을 꼭 나열하게 된다. 그 참고문헌이란
다름아닌 이 논문이 나올 수 있었던 일종의 최초 아이디어부터 시작한 선배들의 업적들이다.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가 있었고, 어디서 저런 이야기를 해서 내가 참조했고, 또 보완했고... 영화? 완전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시네아스트라는 것이 있을 거 같은가? 천만에 말씀이다.

영화는 기술에서 출발하여, 그 진보성과 가능성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산업이 되었고, 그리고 또 일부 어떤 이들의 노력으로 예술의 한 분야로까지 또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하니까, 테크널러지로써의 영화, 산업으로써의 영화, 그리고 철학과 예술로서의 영화 별로 각각의 관점으로 그 선배들과 그들의 작품의 발자취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연대기순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최소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필수과정이다.

꼭 연대기 순이어야 한다. 시간이 엉퀴면 사상도 엉퀴고 인과 관계도 없어진다. 이건 평론가도 마찬가지이고, 기자도 마찬가지이고, 감독도, 작가도, 촬영기사도 모두모두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1895년 영화의 탄생 이후 100년 역사 다룬 다큐도 많고, 100대 영화 뭐 이런 것도 많다.

그리고 그 수많은 결과물 중에서 비교적 좋은 것들을 추려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자 하는 것이
각종 시상식과 영화제이므로, 적어도 이 공식기록으로 남은 것들에 대한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잡지사 기자 정도라면 최근 깐느영화제 수상작 제목 정도는 알고 있으면 더 좋겠다.

몰라도 된다고? 그러면, 가령 양조위의 역대작품도 모른채, 도대체 어떻게 그를 인터뷰하고 평을 하지? 모르면 가십만 나올 뿐이다. 오우삼과 찍고, 후 샤오시엔과 찍고, 왕가위와 찍고, 유위강과 찍고, 장이모와 찍고, 이안과 찍고... 양조위만 파도 중국어권 영화의 감독열전이 나올 지경인데...

2008년 1월 23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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