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타이틀은 비싸다. 영화 타이틀 하나가 3만원이 훌쩍 넘는다, 2만원도 아니고. 3만원이라는 금액은 확 지르지 못하고 주저하게 하는, 그래서 이놈의 지갑이 예전에 비해 훨씬 가벼워졌음을 상대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숫자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부른척 부자인척 간간히 하나씩은 사서 보는, 정신을 못차렸는지 사치를 아직은 부리고 있다.

2006년 BBC에서 처음 방송되었던 <planet earth 살아있는 지구> 는 정말 큰맘 먹었지. 예전에 DVD로 출시되었을 때도 이 다큐는 왠지 고화질로 봐줘야 할 듯 해서 일부러 더 기다렸다가 최근에 구입한 블루레이 타이틀로 그 11부작을 다 보았는데...



사람의 발길과 손길이 좀처럼 닿기 어려운 남극, 북극, 산, 강, 동굴, 사막, 얼음, 평원, 밀림, 천해, 심해, 숲, 그리고 도대체 이런 곳에서 무엇이 살 수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는 척박한 환경임에도 삶을 어떻게든 영위하는 갖가지 동물과 식물과 곤충들의 모습, 때로는 고난과 역경을 담아낸 BBC 다큐다.

이 다큐 시리즈는 BBC, Discovery ch., NHK, CBC 등의 방송사들의 공동제작이라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제작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담겨진 지구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을 촬영하고 편집한 그 인간들의 집념과 용기가 대단하고, 그야말로 인간승리구나 라는 생각만 계속 든다. 이런 건 엄청난 비효율적 인내력과 투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고보면 공영방송이란 이런 비효율적인 집념과 인내력의 산물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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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런거다. 아프리카 평원, 건기를 맞아 땅은 풀이 바짝 말라버리고 먹을 물이 없다. 코끼리는 물을 찾아 정처없이 기나긴 대이동을 시작한다. 사자도 먹을 물을 찾아 떠난다. 그러던 어느날 코끼리떼는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를 찾았고 그토록 기다린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사자도 그곳에서 물을 마신다.

밤이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아프리카 평원. 생각해보니까 촬영이 아니었다면 빛이 있을 리가 없다. 밤에 잘 볼 수 없는 코끼리떼. 도대체 얼마를 굶었을까, 배고파 죽겠는 사자들. 사자들은 원래 코끼리는 먹지 않는다고 하나, 지금은 그런거 가릴 때가 아니다. 사자들은 코끼리 한마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건기의 아프리카 평원 어느날 밤, 그토록 찾던 작은 물웅덩이 옆에서 목을 축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코끼리떼. 그러나 아무것도 안보이는 깜깜함 속에서 사자들이 코끼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 커다란 덩치는 도망가면서 사자들의 공격을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너무 깜깜해서 보이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사자들은 집요하게 엉겨붙고 코끼리는 결국 사자들의 맛없는 만찬이 되고 만다. 괜히 <눈먼 자들의 도시> 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 짧은 장면. "도대체 어떻게 찍었나, 그 깜깜한 밤에 사자가 코끼리를 잡아 먹을 거라고 예상이나 한 것일까? 그리고 조명은 어떻게? 또 무슨 카메라로 촬영을 한 것이지?" 하는 궁금증에 앞서 나는 그 장면이 "인간 세상 속성의 한 단면을 순간 포착한 것 같다" 는 생각을 먼저 했다. 약자와 강자, 어둠과 사냥, 그리고 제물과 희생. 인간의 본성은 초식일까 맹수일까? 사실 이것이 경제 이데올로기의 출발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사자같은 맹수가 원하는 것은 어둠이다. 코끼리가 볼 수 없어야 하니까. 보이지 않아 두려움에 떠는 코끼리에게 사자는 몰래 다가가 앞발을 내밀어 할퀴고 문다. 큰손들과 기관투자자들은 개미들에게 정보를 노출하지 않는다. 대기업들의 임원들은 정치권에 상납할 비자금을 조성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보이지 않는 돈. 정치인들은 야합하고 날치기 한다. 전쟁터에 무기를 팔아 떼돈을 버는 기업 총수와 파괴된 도시, 그리고 그 재건으로 떼돈을 버는 기업과 은행. 어둠의 정치와 어둠의 경제에서는 약자와 강자, 제물과 희생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언론을 장악하고 여론을 통제하려는 시도. 은행을 장악하려는 시도. FTA를 통과시키려는 시도. 이것들은 경제적 정치적 어둠의 사냥꾼들의 속성이다. 그들은 양지에서 협상하고 거래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촛불을 훅 불어 꺼버린다. 야행성 인간들. 범죄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다큐에는 동물들의 사냥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추운 북극지방 평원에서 펼쳐지는 사냥, 죽어라 도망가는 순록떼를 끝까지 쫓아가는 늑대. 그야말로 사투다. 그나마도 이 사투는 낮이라 가능한 것일까. 밤에 이루어지는 사냥? 본래 야행성이라는 사자는 밤에 사냥을 많이 한다고 한다. 왜 밤에 사냥을 할까... 밤에는 동물들이 활동을 잘 안할텐데.

생각해보면 인간도 밤에 사냥한다. 아무도 모르게. 범죄도 밤에 발생하고. 본래 사악한 인간들의 순한 인간 사냥은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다. 흡혈귀도 빛을 가장 두려워 한다. 정치, 경제, 사회는 대평원이며 이 지독한 사냥은 우리가 잘 못보는 밤에 이루어진다. 게다가 이것은 어떤 작전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늑대, 사자들의 사냥은 무작정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냥 작전을 사용한다고 하니까. 보면 사람들은 '밤에 하는 사냥'을 "에이, 음모론이네" 로 치부해 버리곤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정말 hunt in the dark 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


2009년 3월 4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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