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시스템에 대해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실은 문제가 있다. 그것이 완벽한 프로그래밍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아니라 그때그때 불완전하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인간의 판단에 의해 굴러간다는 거다. 인간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과연 무슨 기준을 근거로 삼을까?

여기저기 이해관계가 복잡한 그 인간의 판단이란 것이 과연 완벽에 가깝도록 합리적일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 '판단' (Judgment) 이라는 것의 실체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국회, 법원, 정부, 경찰, 기업 등 모든 제도가 해당된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앞에서 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시스템 그 자체는 한치의 결함도 없이 완벽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것이 계속 갈지 어디로 갈지 언제 멈추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작동 버튼을 누르는 '판단'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하고 있다는 점을 절대로 놓치면 안된다. 자, 대전제가 나온다. "시스템은 믿되 인간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시스템은 결국 인간이 통제한다. 고로 시스템은 믿을 수 없다 "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를 연출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2007년 작품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는 간단히 말하면 위 대전제의 한 사례로서 '인간 판단의 비합리성'으로 인한 사법 시스템의 헛점과 허구성때문에 무고한 인간이 얼마나 심각하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잔인할 정도로 침착하게 보여준다. 143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 사법제도가 합리적인 judgment 를 내리기를 기대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관객들의 초조함과 긴장감에 비하면 오히려 짧게 느껴진다.

NEET족에서 벗어나 직장인이 되기 위한 회사 면접을 보러가기 위해 만원 지하철에 오르는 주인공 텟페이. 하지만 옷이 문에 끼고 만다. 이동 내내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문이 열리고 내리지만 뒤따라 내린 한 여중생에게 손목을 잡히고는 그 여중생의 엉덩이를 더듬었다는 이유로 현행범으로 체포가 되어 면접도 못보고 바로 경찰서로 잡혀가게 된다. 나는 이 설정 자체에 참 관심이 간다. 텟페이는 일본 사회에서 두번 죽는 꼴이기 때문.

구치소에 수감된 채 주인공은 혐의를 계속 부인하고 경찰은 합의만 보면 딱지 끊고 벌금만 내는 수준에서 석방된다며 적당히 넘어가자고 종용한다. 경찰은 이런 치한들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나 있는 상태다. 실제 치한 짓을 한 놈들은 취조실에서 조금만 협박해도 대부분은 자백을 해버린다. 그렇다면 끝까지 안했다고 버티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놈들은?  바로 이들이 문제인거다.



경찰은 텟페이를 그저 '악질'이라고 여길 뿐이다. 용기를 내어 현행범을 잡은 여중생의 인권 보호가 더 중요한 이슈이며 인권 침해 현행범으로 잡힌 텟페이는 수감된 채 각종 정신적 고문을 당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밝혀진 것은 오로지 그 피해자 여중생의 증언 뿐, 텟페이의 혐의는 입증되기 전 상태다. 경찰은 확실한데 혐의를 부인한다는 자신감으로 텟페이를 악질 치한범으로서 치부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경찰 제도의 헛점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텟페이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죄송하게 되었다'라며 벌금 5만엔에 합의를 하지 않고 재판을 선택한다. 텟페이는 일차적으로 경찰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깨진 상태다. "경찰이 법과 질서를 집행하는 시스템이라고? 법원은 다를 거다. 난 하지 않았어." 재판을 하기로 한 선택은 기본적으로 사법부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자, 이제 검찰은 텟페이를 기소한다. 그리고 텟페이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변호사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텟페이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각종 증거 및 증인들을 찾아내고 영화는 이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유죄 입증 뿐 아니라 무죄 입증 또한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는 이 무죄 입증 조사 과정의 장면들과 500만엔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 나는 것을 포함하여 판사가 변경되기까지 하면서 총 2년 및 12회에 걸치는 공판 진행 장면들을 번갈아 겹쳐 놓음으로서 그때그때 과정과 중간결과를 계속 나열 및 발표하는 식으로 영화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스토리를 침착하게 끌어간다. 5만엔의 합의금 거부가 500만엔의 보석금으로 불어나는 것 또한 대단히 비합리적이다.


또한 그들이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증거와 정황 하나하나에 대한 추리와 사유를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과정과 추리를 통해 텟페이가 정말로 무죄일까 유죄일까를 판단하는 과정에 동참하게 한다. 그리고 그 변호사 수수료나 보석금 그리고 액수로 평가하기 힘든 주인공 및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 등 그 황당한 비용이 발생하게 되는 일차적인 원인이 결국 이 '비합리적 judgement' 가 가능한 사법 제도의 불완전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한다.

사실 이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이라면 여중생이 악의를 가지고 소리만 지르고 그를 뒤따라가 그의 손목을 잡으며 "이 사람이 내 엉덩이를 더듬었어요" 용기를 낸 척 해도 주인공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 모든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찔한 순간이다.

왜냐고? 간단하다. 판사는 검찰이 범죄자라고 확신하는 용의자의 기소를 무효화시키는데 큰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검찰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판사가 그 조직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앞 길에 장애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그깟 니트족 치한 용의자 한 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힘들게 사법고시를 패스하여 사법제도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 보장받는 각종 혜택과 권력과 신분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미래를 놓칠 수 없다. 법원도 결국 조직이며 위계질서가 특히 강한 신분주의 세계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정말로 법 집행의 합리성에 의거하여, 즉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정하여 판단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려는 판사가 변호사와 피고인에 호의적이자 바로 교체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교체되어 새로 판결을 하게 될 판사는 간단히 말해 검찰에 호의적으로 변호인단의 모든 입증 자료를 귀담아 들으여 하지 않는다. 이미 판결은 내려진 상태다. 조직 내에서의 그 판사의 출세가도가 내린 판결이다. 그리고 교체되어 나간 판사는 이내 지방좌천이 된다.

***

검찰과 판사는 일종의 공모자일 수 밖에 없다. 정황상 이 피고인이 무죄라고 합리적 judgment 를 내려야 하는 것이 판사의 당연 의무이긴 하지만 검찰이 범죄자라고 주장하는 이 놈을 무죄라고 하는 순간 판사는 조직내 위계질서와 자신의 미래라는 무형의 법관으로부터 판결을 받게 된다. '너는 낙오자 될래? 조직 생활 피곤할텐데...'

즉, 무죄를 무죄라 하고 유죄를 유죄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망치로 꽝꽝 판결을 내리는 것은 결국 사법제도 내에서조차 완벽하게 지키기가 어려운 일이 된다. 완벽한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인간의 이해관계가 초래하는 비합리성으로 간단하게 무너지는 거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블랙화면에 어떤 문구를 보여준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죄없는 한사람을 벌하지 말라"

사법제도의 합리성이란 '열 명의 죄인을 벌하는 것'일까 아니면 '죄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주제다. 전자는 '양'을 미덕으로 후자는 '질'을 미덕으로 본다. 세상에 죄인은 넘쳐나고 그들을 벌하는 것은 합리적인 시스템이지만, 덜 잡아들이더라도 그 중에 섞여 있을 죄없는 사람을 구별해 내는 것은 결국에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인간의 몫이다.

'양'을 중요시 한다는 것의 의미는 성장을 중요시한다는 것의 의미와 통한다. 성장을 위해서 균형을 포기하고 팽창을 위해서 밀도를 버리는 따위의 가치관, 우린 지금 그런 가치관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만약 지금 이명박 정부가 이 블로그를 비롯하여 "정부 나빠요" 하는 블로그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사이버 모욕죄를 입법화하고는

바로 내 집에 쳐들어와 "당신은 이런이런 죄를 저질렀어, 경찰서로 가야겠다. 우린 열명의 죄인을 다 잡아들일거야" 하며 나를 취조실에 쳐놓고는 멋대로 내가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라고 취조문을 만들어 대고, 내가 혐의를 부인하면 나를 기소하고는 판사와 짝짜꿍해서 나에게 징역 3년형을 꽝 때리는 것, 사실 이건 정말 간단한 일이다. '열 명의 죄인을 벌해야 한다' 라는 것이 그들의 사법적 합리성이 된다.

물론 없는 죄도 만들 수도 있다. 나를 미행하고 있다가 만원 지하철에 탔을 때 한 여고생을 꼬드겨 난데없이 '그만하세요' 하게 하더니 내리는 나를 뒤쫓아와 내 손목을 잡고는 "이 사람이 내 엉덩이를 더듬었어요" 하고 나를 잡아 가두고는 내 스스로 나의 자존감과 품격을 떨어뜨리는 합의를 하지 않을시 온갖 범죄항목을 만들어 재판에 회부해버리는 것, 또한 실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실제로 이런 일은 많이 있었다.

성장주의, 팽창주의, 출세지향주의, 가족이기주의... 한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열 명의 죄인을 벌할 수 밖에 없다라는 판단 근거로 텟페이에 고통을 주는 시대, 가 지금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인공의 혐의 부인을 이 놈이 진짜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이 긴 재판의 원인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 모든 사회적 비용과 한 인간과 그 가족에 그렇게 큰 고통을 주면서 장기화되는 재판의 실체가 실은 사법 조직 자체의 문제에서 기인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죄가 없는데 혐의를 인정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은 타락하는 것임과 동시에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는거다.

주인공 텟페이는 너무도 오래 끌어 온 이 재판의 판결을 내리는 마지막 공판의 증언대에 선다. 자 이 재판장 공간 안에서 진실을 아는 유일한 인물, 피고인. 판결은 그만이 내릴 수 있다.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리던지 피고인은 알 수 있다. 저 판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검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중생의 엉덩이를 만졌는지 안만졌는지는 오직 피고인 자신 만이 알 뿐이다. 법원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곳이다.

아니! 그 판사는 피고인이 무죄라는 것을 안다. 검찰도 안다. 그들은 시스템으로서 사법제도가 요구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판단을 내릴 뿐이다. 자 이것이 그들의 합리성이다.

2008년 12월 23일 작성


Posted by bop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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